“기업이 취준생에 부모 직업 왜 묻냐고? ‘그 부모에 그 자식’ 아니겠나”

기사승인 2015-08-24 11: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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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취준생에 부모 직업 왜 묻냐고? ‘그 부모에 그 자식’ 아니겠나”

[쿠키뉴스=정진용 기자] “부모님이 부끄럽기도 하고 이렇게 느끼는 저 자신 때문에 죄송해요”

졸업을 미루고 취업 준비 중인 조모씨(25)는 이력서의 ‘가족관계란’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조씨의 부모님은 고졸이다.

그는 “취업설명회에 가면 면접에 가거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 부모님 얘기 하지 말라고 팁을 주는데 왜 이력서에서는 엄마 아빠 학력을 쓰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두 분 다 고졸이신데 괜히 다른 지원자들과 비교될 것 같고…. 저 하나 떨어지는 것도 좌절감이 드는데 이력서를 통해 저 뿐만 아니라 제 가족까지 평가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우울하죠”라고 털어놨다.

이력서에서, 면접에서…부모님 재력 대놓고 물어보는 기업

부모님의 직업을 묻는 정도는 양호한 수준이다.

취업준비생(취준생) 박모씨(26)는 최근 한 대기업에 이력서를 쓰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부모님이 최종 졸업한 학교의 이름과 직장 내에서의 ‘직급’까지 쓰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력서를 작성하기 위해 어머님께 어느 학교 졸업하셨느냐고 여쭤봐야 하는 상황이 기가 막혔지만 취준생이 뭘 할 수 있겠는가”라며 “어떤 기업은 조부모 직업까지 추가로 기입할 수 있는 이력서를 제시 하더라”고 덧붙였다.

이력서뿐 아니라 면접에서도 부모님의 ‘재력’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취업박람회를 방문한 이모씨(28)는 “부모님이 나이가 많으신데 아직도 일을 하시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자가인가 전세인가”라는 면접관의 질문을 듣고 황당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솔직히 이 정도 되면 부모님 잘 만나는 것도 스펙”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이씨만이 아니다.

지난 9일 취업포털 사이트인 사람인이 취준생 900명을 대상으로 ‘부모님의 지위, 재산 등 여건이 본인 실력보다 취업성공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설문조사한 결과, 10명중 6명 이상(64.6%)이 ‘영향을 미친다’라고 응답했다.

‘그 부모에 그 자식’ 선입견에서 가산점까지

기업의 입장은 어떨까.

부모의 직업이 구직자의 합격 당락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느냐는 물음에 한 기업 인사팀 관계자 A씨는 “참고 안 하는데 쓰게 할 리가 있느냐”고 잘라 말했다.

이어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선입견이 아직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부모님 직업이 단순히 구직자에 대한 인상이나 선입견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점수’로 반영되거나 부서 배치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한 중소기업 인사담당자 B씨는 “일반회사들은 회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경우 가산점을 주기도 한다”며 “특히 금융권 기업들이 부모님 직업과 재력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실제로 신입사원을 뽑고 난 뒤에 부서배치 하는 과정에서 연수성적 더 좋은 사원보다 정부 고위층 관계자의 딸이 연수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좋은 부서로 배치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대기업 관계자 C씨는 “솔직히 국회의원 같이 사회 고위계층의 자녀가 있으면 회사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차별 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강제성은 없어

취준생들은 이력서에 가족 관계 정보를 기재하는 것이 차별적이며 불쾌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누락되면 곤란해질까 봐 할 수 없이 기입 한다고 대답했다.

취준생 최모(28)씨는 “도대체 부모님 직업이 나의 업무 능력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안 쓰기엔 또 불안하다”라며 “부모님이 대학을 나오지 않으셨거나 부모님이 아예 안 계신 구직자에게는 차별 아닌가. 인권위원회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외국의 경우 부모 직업은커녕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진 부착도 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외모 차별 논란을 우려해서다.

종합편성채널 JTBC 예능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의 출연자 타일러 라쉬(27·미국)는 지난해 9월15일자 방송에서 한국의 이 같은 관행에 대해 “미국에서는 고소감”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국민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관계자는 “2003년에 발표한 ‘입사지원서 차별항목 개선안’에서 기업들에 지원자의 신체사항이나 가족의 성명·연령·직위·월수입 등 총 36개 사항을 지원서 항목에서 제외하라고 권고 했지만 강제성이 없어 현재로선 규제할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jjy4791@kukimedia.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