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불명] “제게 맞은 여러분께 사과 말씀 드립니다”

기사승인 2017-02-23 17: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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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인불명] “제게 맞은 여러분께 사과 말씀 드립니다”[수취인불명]은 최근 화제가 된 사안과 관련, 가상의 화자를 설정해 작성한 편지 형식의 기사입니다.

[쿠키뉴스=이소연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헌법재판소 앞에서 22일 태극기를 든 시민들이 모여 ‘탄핵 무효’를 외쳤습니다. 지난해부터 박 대통령 탄핵 기각을 촉구하는 집회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등장했는데요. ‘맞불집회’로 불리던 보수단체의 집회 명칭은 이제 ‘태극기집회’로 굳어진 모양새입니다. 정광용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태극기를 보면 탄핵 기각부터 떠올려 뿌듯하다”고 말했습니다.

태극기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국민의례도 하기 싫어졌다” “아이들이 태극기를 부정적 의미로 인식하게 될까 걱정이다” 등의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박사모 등 보수단체는 다음 달 1일 3·1절을 맞이해 대규모 태극기집회를 예고했습니다.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선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까요?   

국민 여러분께 

“꼴도 보기 싫다” “혐오스럽다”는 말, 모두 이해합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지나다 저를 마주치면 눈을 흘기거나 멈칫하고 한걸음 물러서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잠시 떼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도 현재 상황이 당황스럽습니다. 일부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저를 무기 삼아 휘두를 때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게 맞은 기자 그리고 시민 여러분,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지난 11일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이날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한 시민이 ‘즉각 탄핵’ 피켓과 노란 리본을 단 채 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왔습니다. 제 소유권을 두고 몸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차라리 솔로몬처럼 “반으로 가르는 게 어떻겠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특정 단체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일뿐입니다. 소지하는 데 특정한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기각을 바라거나, 자유한국당을 지지해야만 저를 흔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여러분의 미움을 받는 게 조금은 억울합니다. 저는 시민이 모인 광장에서 늘 함께해 왔습니다. 지난 1919년 3월1일 일제 맞서 만세를 외칠 때도, 60년 4월19일 독재·부패 타도를 부르짖을 때도 시민의 손에서 펄럭였습니다. 80년 5월 광주에서도 여러분의 곁을 지켰습니다. ‘빨갱이’로 매도당한 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듯 힘차게 저를 흔들었습니다. 상무관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관을 감싸 안으며, 조금의 온기라도 전해지길 바랐습니다. 87년 6월, 대학생·시민과 걷던 그날 역시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30년 전, 거리에 있던 당신이 오늘은 촛불을 들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국민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던 날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지난해 브라질 리우올림픽까지. 높게 계양돼 펄럭이는 저를 보며 어깨가 으쓱해진 순간도 있을 겁니다. 좋았던 기억마저 나쁜 기억으로 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태극기 망토’ 하면 박 대통령 탄핵 심판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김연아 선수가 저를 어깨에 걸치고 빙상경기장을 누볐던 날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앞으로 대한민국에 있을 영광의 순간을 여러분 곁에서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저를 외면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평화의 상징 ‘태극기’ 드림  

추신 : 성조기도 당황스럽다고 전해달랍니다. 

soyeo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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