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 맞은 아내와 딸… 사내는 울부짖었다

[5·18 시민 곁의 그들②] 그날 의사 가운은 피로 물들고

기사승인 2017-08-05 0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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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김양균 기자] Q. 518 민주화항쟁 당시 계엄군에 짓밟힌 시민들을 돌본 의료진들이 있었다. 당시 택시운전사와 의료진은 자·타의로 역사적 사건에 개입하게 됐다. 택시운전사 대신 의사로 분해 5·18을 바라본다면 어땠을까?

“또 다른 시선이 있었을 것이다. 의료인으로 비극의 참상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다만, 직업인으로서의 의료인보다 그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함께 광주에 간 기자와 택시운전사의 입장은 다르다. 극 중에서 택시운전사는 돈을 벌려고 비극의 현장에 가게 된다. 의사도 환자 치료를 비롯해 어떠한 사회적 함의의 입장(시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건 비단 5·18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질 수 있는 시선일 것이다. 

송강호는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광주에 태워다준 택시운전사 김만섭으로 분했다. 영화에서 그는 평범한 택시 운전사가 어떻게 역사적 비극에 함몰되는지를 연기했다.   

▷문응주 1980년 전남대병원 인턴의 증언=1980년 5월 21일 나와 몇몇 동료 의사들은 11층 숙소에 있었다. 창밖으로 도청의 상황을 살펴보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계엄군이 도청을 둘러싸고 시민들이 그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빵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아, 계엄군이 총을 쐈구나!’

순간 도청 앞에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우르르 그 자리에서 도망 나왔다. 잠시 후, 빨간색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 하나가 전남대병원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동료 의사들과 함께 부랴부랴 응급실로 뛰어 내려갔다. 병원을 향해 달려온 트럭에는 총에 맞은 환자가 실려 있었다. 발포 명령 이후 처음으로 병원에 들어온 총상 환자였다. 총상을 입은 이마 부위는 뻥 뚫려 있었다. 

응급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총상 환자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21일 전에도 장갑차 위에 올라갔던 조대부고생이 복부에 총상을 입고 내원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응급실 바닥부터 복도, 원무과 앞까지 환자들로 가득 찼다. 병원의 모든 인턴들이 응급실에 투입되었다. 당시 군의관으로 근무하며 경력을 쌓고 온 인턴들이 많았다. 덕분에 조금은 수월했던 것 같다. 

환자를 보면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의식이 없는 환자들은 차트를 만드는 일부터 난항이었다. 급한 대로 환자의 이마 등에 ‘청바지 남’, ‘빨간 바지 여’ 등과 같은 특징을 적고 차트를 작성했다. 응급실에서 쓰는 의료 기구도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응급실에는 스몰 세트와 라지 세트라는 수술 세트가 있었다. 

스몰 세트는 상처 부위를 꿰매는 등의 간단한 수술을 할 수 있는 기구 세트였고, 라지 세트는 더 깊은 상처를 수술할 때 쓰는 기구 세트였다. 그런데 환자들이 너무 많다 보니 수술 세트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별수 없이 사용했던 기구를 알코올로 닦아 가며 수술을 계속했다. 

교수님들은 쉬지 않고 수술했다. 오봉석 선생님, 김영진 선생님, 정상영 선생님 등 외과, 정형외과 주치의 선생님들도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인턴들도 밀려오는 환자들을 보느라 응급실을 떠나지 못했다. 간호사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 많은 환자가 몰려들었지만 병원은 침착하게 잘 돌아갔다. 

그러는 와중 계엄군은 환자가 있는 응급실에 최루탄을 터뜨렸다. 최루가스 때문에 도저히 환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응급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위층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21일, 공수부대가 화순 쪽으로 퇴각했다. 퇴각을 하면서 사방에 총을 쏘아 댔는데, 병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원 밖에서 따따따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병원 외벽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였다. 총알 자국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무렵 많은 외신기자들이 병원을 찾았다. 독일 쥐트도이체 차이퉁과 프랑스 르몽드지, 일본 아사히지 등 여러 외신들이 병원을 찾아와 인터뷰를 해갔다. 우리는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일을 보도해 주길 기대했다. 반면 국내 언론의 태도는 조용했다. 국내 기자 몇 명이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접수실이나 수위실에 들러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돌아갔을 뿐, 병원 안으로 들어와 환자들을 살펴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계엄군 총 맞은 아내와 딸… 사내는 울부짖었다

한창 5·18이 진행 중일 때, 용달차를 몰고 광주에서 담양으로 가던 남자가 있었다. 용달차에는 아내와 어린 딸이 함께 타고 있었다. 당시는 계엄군이 광주의 모든 출입을 통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계엄군은 용달차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남자의 아내와 딸이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왔다. 남자는 아내와 딸아이의 침상을 오가며 울부짖었다. 몸부림치며 울던 남자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경찰을 치료한 적도 있었다. 군인들이 시민 진압에 투입되기 전, 경찰들이 시민 진압에 먼저 투입되었다. 당시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군경저지선을 뚫고 돌진하던 광주고속 차량이 경찰이 사망하기도 했다. 정부의 편이든, 시민의 편이든 치료가 필요한 환자였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그 경찰을 치료했다. 하지만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역시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시간이 흘러, 병원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나는 정성수 선생과 밖으로 나와 상무관으로 향했다. 상무관 바닥에는 관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5·18 희생자들의 시신이 담긴 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죽은 아들을 보고 대성통곡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관 하나하나를 보듬으며 우는 사람도 보았다. 희생자들에게 참배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곳에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있었다. 

5·18 기간 동안 시민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시민군은 매일 병원에 들러 의료진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물었다. 워낙 환자가 많다 보니 병원이 보유하고 있던 약품이 바닥을 보일 때였다. 시민군은 알코올 등 부족한 약품을 구해다 주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5·18 초기에는 병원에 혈액이 부족했다. 시민군은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방송해 알렸다. 소식을 접한 많은 시민들이 헌혈에 동참했다. 헌혈을 하려는 시민들의 줄은 병원 앞에서부터 병무청 앞까지 길게 이어졌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병원을 찾아와 헌혈을 해 주었다. 덕분에 혈액 부족 문제는 해결되었다. 

세월이 흘러 5·18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는 기대 이하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갔다. 80년 5월, 광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 같다. 5·18 기간 동안 의사들의 가운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의사들은 피가 굳어 뻣뻣해진 가운을 입고, 또 입어가며 환자들을 돌봤다.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절실했다. 오직 의료인으로서 순수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 순간에도 죽어가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역경을 딛고 일어선 광주는 오히려 더 고립되어 버린 것 같다. 

(이 글은 전남대병원의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중 문응주 1980년 당시 전남대병원 인턴의 증언 <아내와 딸아이의 침상을 오가며 울부짖었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쿠키뉴스-전남대병원의 기획연재 <5·18 시민 곁엔 그들이 있었다>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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