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⑤ [단독] 58년만의 부고…“곡괭이 잡은 채 생매장됐다니”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사승인 2017-08-11 06:00:00
- + 인쇄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 고베=정진용, 이소연 기자] 강제동원 피해자뿐일까. 일본에서 열악한 환경에 신음하다 숨졌지만 잊힌 조선인들도 있다.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진 38년보다 앞서 숨졌다는 이유 때문이다. 정부는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를 38년 4월1일부터 45년 8월15일까지 차출된 이들로 규정한다. 강제동원 피해자보다 앞서 고통 받았으나, 국가는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지 못했다. 모국을 대신해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조선인 노동자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  

▲ 가장 위험한 작업에 배치됐던 조선인…무성한 잡초 속 노동자상

'고베전철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상'(神戸電鉄敷設工 事朝鮮人勞動者の像)(노동자상)은 공사 현장에서 숨진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고베전철은 지난 20~30년대 고베 시내와 일본 3대 온천인 아리마(有馬)를 잇는 공사를 진행했다. 장장 34.5km에 달하는 거리였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1200~1800명. 이들은 일본인과 같은 수준의 임금과 대우를 약속받고 고향을 떠났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공사 현장은 가혹했다. 동일한 임금은커녕 임금 체불이 빈번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4회에 걸쳐 노동쟁의가 일어났지만 바위에 계란치는 격이었다. 변화는 없었다. 안전장치 미지급으로 사망자도 다수 발생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가장 위험한 작업에 배치됐던 조선인이었다. 

지난 5월25일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노동자상이 위치한 고베(神戶)시 효고(兵庫)구 에야마(會山) 공원을 찾았다. 노동자상은 숨진 이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고베전철 선로를 마주 보고 있다. 공원 언덕에는 성인 허리 높이까지 풀이 무성했다. 이날 철로 옆에서 만난 고베전철 소속 일본인 근로자는 “동상이 있는 것은 알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노동자상 뒤편에는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 사망자 13명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다. 한계문(당시 나이 42)씨와 조봉주(30)씨는 지난 27년 8월1일 고베시 북구 야마다(山田)쵸 시모타니가미(下谷上) 인근 공사 현장에서 토사 붕괴로 사망했다. 김상섭(26), 황범수(31)씨는 지난 28년 1월15일 고베시 히가시야마(東山) 터널 공사 야간작업 중 숨졌다. 박종술(26)씨와 김영득(26)씨, 강태룡(26)씨는 같은 해 석재에 깔리거나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6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참사도 있었다. 지난 36년 11월25일 아이나(藍那) 터널 공사 현장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했다. 경북 고령 운수면 출신의 박남근(32), 경북 영덕 남정면 출신의 이명복(24), 경남 고성에서 온 김봉두(47)·김동계(25), 고향이 확인되지 않은 강학수(36)·진남술(30)씨가 희생됐다. 이 중 김봉두씨와 김동계씨는 부자(父子)지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숨졌다.  

▲ 정부가 할 일 대신한 일본 시민단체…희생자 찾고 유가족에 알리기까지

조선인 희생자 13명의 이름과 고향을 ‘발굴’해 낸 것은 일본의 학자와 시민운동가였다. 지난 92년 재일동포 2세인 고(故) 김경해씨와 히다 유이치 강제동원진상규명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68)를 중심으로 ‘고베전철부설공사 조선인희생자조사·추도회’(추도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도서관에서 20~30년대 신문을 일일이 뒤져 13명의 흔적을 찾아냈다. 추도회는 유가족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황범수씨와 김씨 부자의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추도회에 따르면 아이나터널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김순아씨는 “곡괭이를 잡은 채 생매장됐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애통해했다. 두 가족은 지난 94년 처음으로 사고 현장을 방문,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추도회는 발족 직후부터 고베시와 고베전철 측에 동상 건립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초대 대표는 고베시의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고(故) 오치아이 시게노부씨였다. 고 오치아이씨는 고베시 역사를 책으로 펴낸 인물이다. ‘고베전철 50년사’라는 책도 출간했다. 그랬던 그도 추도회 활동 이전까지는 고베전철 공사 중 희생된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베전철 연혁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 오치아이씨는 93년 고베전철 본사를 방문해 “고베전철의 역사를 저술할 때 ‘왜 조선인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고베전철 측은 “(본사에는) 조선인 노동자 자료가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는 하청 업체에서 관리해 본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핑계였다. 추모비 건립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고 오치아이씨는 같은 해 추도회 중간보고에서 “민족적 멸시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희생됐다”며 “그러나 희생자 일부 유골은 수습조차 되지 않은 채 5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지적했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⑤ [단독] 58년만의 부고…“곡괭이 잡은 채 생매장됐다니”▲ 우여곡절 끝 건립된 노동자상…추도회에 한국 총영사관 참석한 건 딱 한 차례

분위기가 바뀐 것은 지난 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이후다. 고베시를 덮친 대지진으로 6300여명이 사망했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재일 한국인의 피해도 극심했다. 고베시는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재일 한국인 차별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졌다. 변화의 바람은 조선인 추모비 건립 운동에도 미쳤다. 같은 해, 고베전철과 시는 추모비 건립에 필요한 부지 제공을 약속했다. 추도회가 설립된 지 2년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이후 추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이 시작됐다. 지역 주민, 재일동포 등으로부터 200만엔의 성금이 모였다. 고베전철 측도 10만엔을 기부했다. 성금을 토대로 노동자상은 지난 96년 11월24일 세워졌다.  

매년 10월이면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집회가 열린다.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와 재일동포 등 20여 명이 참석한다. 다만 추도회가 지속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현재 회원 대다수는 60대 이상이다. 히다 공동대표는 “구성원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있어 추도모임이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면서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계속해서 추도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세대를 발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고베전철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주 고베 한국 총영사관은 노동자상 제막식이 있었던 96년 단 한차례만 모습을 비췄다. 한국 정부가 외면한 것은 고베전철 노동자의 죽음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강제동원 이전 조선인 노동자 피해 사례를 단 한 차례도 조사하지 않았다. '나카츠가와(中津川) 조선인 학살 사건'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저항하던 조선인들이 생매장된 정황도 있으나 진상규명은 요원하다. 위원회는 38년 국민총동원령 이후의 사건만 조사했다. 위원회 종료 후, 업무를 이관받은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게도 강제동원 이전 시기 피해 사례는 관심 밖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95년부터 정부 측에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전체적인 조사를 제안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식민 지배 당시 인적·물적 피해 등이 여전히 정확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국민총동원령 이전의 피해 규모에 대해서도 국가차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