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았던 열흘… 5·18 그날의 참담한 시간들

[5·18 시민 곁의 그들⑧] 1980년 5월 18일~27일 사태일지

기사승인 2017-09-09 0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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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는 총 8회에 걸쳐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시간에 따른 사태 일지를 전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연재가 진행되면서 날짜별로 의료진의 증언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시간대별로 진행된 사태의 진행은 ‘피의 기록’으로 부를 수 있겠다. 민주주의의 수호나 시민의식 등의 놀랍고도 감동적인 부분도 상당하지만, 인쇄된 활자에서 흡사 당시의 피 냄새가 나는 듯 한 착각마저 들었다. 

연재가 진행되었던 9주 동안 개인적으로 5·18 관련 자료를 적잖이 들춰보았다. 특히 해외 쪽의 자료는 적나라한 이미지가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어 매우 충격적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 때문에 해당 연재를 하루라도 빨리 종결짓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관찰자로서의 감정이 이러할진대, 당사자의 트라우마는 오죽할 것인가. 금번 연재를 통해 5·18의 참상을 단 한 명에게라도 제대로 전했다면 그것으로 보도의 의미는 충분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참혹했던 그 열흘로 돌아가 보자. 



◇ 5월 18일
최초로 전남대병원에 손아무개 환자가 실려 왔다. 그는 공수부대원에게 곤봉으로 복부를 가격당해 복통과 구토를 호소했다. 이날 총 17명의 환자 대부분은 곤봉에 맞아 두부열상, 골절, 찰과상 등의 외상환자였다. 

00:00=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됐다. 

02:00=7공수여단 33대대는 전남대와 광주교대를 점거했다.

02:30=7공수여단 35대대도 전남대의대와 조선대를 점거했다.

09:40=전남대 학생들은 정문에서 광주로 진주한 7공수 부대와 접전을 벌였다.

10:00=학생들은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10:15=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10:20=“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5:40=유동삼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감행했다.

19:02=계엄사령부는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했다.

◇ 5월 19일
김아무개 학생이 복부에 총상을 입고 응급실로 실려 왔다. 당시 환자는 정신이 혼미해져 있고 우하복부에 1발, 손에 2발의 총을 맞은 상태였다. 

03:00=증파된 11공수여단이 광주역이 도착했다.

09:30=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안 진압에 맞서 임동·누문동 파출소에 불을 질렀다. 

10:00=시민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이 전개됐다. 

14:40=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일명 ‘화려한 휴가’작전.

15:00=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은 회의를 열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달라고 건의했다. 

16:30=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군중에 의해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 첫 발포로 조대부고생 김아무개씨가 부상당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계엄군의 광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투쟁에 나섰다. 

20:00=수만 명의 시민들은 “전두환 타도”를 외쳤다. 

◇ 5월 20일
전남대병원 앞 오거리에서 최아무개 환자가 병원으로 실려 왔다. 왼쪽 가슴에서 폐까지 4~5cm 정도로 깊이 찔린 자상을 입은 상태였다. 

08:00=고등학교가 휴교 조치됐다. 

10:20=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혀진 채 구타당했다.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도 계속됐다. 

18:40=광주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겪은 운전기사들에 의해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의 분위기가 고조됐다. 

20:10=시민들은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했다. 

21:05=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이 사망했다. 

21:50=계엄 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이 과잉진압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자 시민들은 거센 항의를 보내면서 광주MBC건물에 불을 질렀다. 

23:00=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광주역 광장에서 무자비한 유혈진압에 항의하던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은 발포했다.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5월 21일
전남대병원 응급실에는 총상 환자들이 들이닥쳤다. 침대가 부족해 병실의 매트리스를 가져다 환자들을 복도와 원무과까지 눕혔다.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이마 등에 ‘청바지 남’, ‘빨간 바지 남’과 같은 특징을 적고 차트가 작성됐다. 응급실의 의료 기구도 턱없이 부족해 의료진들은 사용했던 기구를 알코올로 닦아가며 수술을 이어나갔다. 계엄군은 병원을 향해 총을 난사해 정문쪽 1층에 있는 정형외과는 캐비닛은 물론, 모든 기기에 총탄 구멍이 났다.

00:35=노동청 방면에서 2만여 명의 군중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02:18=시외전화가 두절됐다. 

04:00=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나타났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 명은 항쟁에 더욱 동참했다. 

04:30=광주KBS 건물 방화

08:00=시위대는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했다. 

10:15=공수부대의 맨 앞은 실탄을 지급받은 부대원들로 교체됐다. 

10:19=광주세무서 건물이 전소됐다. 

11:10=대형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12:59=아시아나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술 진출했다. 

13:00=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리면서 공수부대는 사격을 시작했다. 

13:20=청년들은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졌다. 

14:15=도지사는 경찰헬기에서 시위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했다. 

14:35=시민들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과 장갑차 수십 대를 획득했다. 

14:40=시민들은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를 입수했다. 

15:48=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했다. 

16:00=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16:43=학생들은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 2대를 설치했다. 

17:30=공수부대는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했다. 

◇ 5월 22일
이른 아침부터 전남대병원에는 본관 1층 로비까지 부상당한 환자들로 가득 찼다. 병상이 모자라 바닥에 뉘인 환자들도 많았다. ‘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나돌자 헌혈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400유닛이 넘는 혈액이 확보됐다. 

김아무개 유아는 담양으로 빠지는 길목(우산동)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총알이 오른쪽 쇄골 상방과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호흡곤란과 사지마지로 응급실에 내원했다.  그런가하면 <워싱턴포스트>의 기자와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전남대병원을 찾아와 의료진과 환자를 인터뷰했다. 

09:00=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10:30=군용헬기가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했다. 

11:25=적십자병원의 헌혈차와 시위대의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했다. 

12:00=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됐다. 

13:30=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 7개항의 수습안을 전달했다. 

15:08=서울에서 대학생 500여명이 광주에 도착해, 환영식이 진행됐다. 

15:58=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가 개최됐다. 

17:18=수습위 대표는 상무대 방문 결과를 보고했다. 

17:40=도청광장에서 시체 23구가 추가로 도착했다. 

21:30=박충훈 신임국무총리는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했다. 

◇ 5월 23일
총상 환자는 줄어들었지만, 시외 쪽에서 환자들이 후송됐다. 화정동에서 교전이 벌어져, 시 외곽으로 가는 도로에서 계엄군에 의한 총격으로 새벽부터 응급실은 북적댔다. 

08:00=학생들과 시민들은 금남로 일대 등의 자발적인 청소에 나섰다. 

10:00=시민 5만여 명은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10:15=학생수습위는 자체적으로 특공대를 조직, 총기 회수 작업을 시작했다.  

11:45=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가 붙었다. 

13:00=지원동 주남마을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 승객 18명 중 17명이 사망했다. 주남마을 뒷산에 암매장 됐던 시신은 5·18 직후 주민의 신고로 발굴됐다. 

15:00=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됐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됐다. 

19:40=최초 석방자 33명이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전쟁 같았던 열흘… 5·18 그날의 참담한 시간들

◇ 5월 24일
13:20=공수부대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해, 당시 중학교 1학년 방아무개 학생은 좌측머리에 총탄이 관통해 사망했다. 

14:20=송암동에서 퇴각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해있던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했다. 오인사격 이후 계엄군은 인근 지역 거주민을 다수 살상했다. 

14:50=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 5월 25일 
11:00=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구호대책비 1000만원이 전달됐다. 

15:00=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17:00=재야 민주인사들은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1:10=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을 논의했다.

◇ 5월 26일
05:20=계엄군은 화정동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했다. 

08:00=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10:00=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됐다. 

14:00=학생수습위원회는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했다. 

15:00=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됐다. 

17:00=학생수습위원회의 윤상원 대변인은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을 브리핑했다. 

19:10=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하며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시켰다. 

24:00=시내전화가 일제히 두절됐다. 

◇ 그리고 5월 27일
전남대병원 인턴 숙소를 사이에 두고 병리학 교실과 간호사 숙소 건물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이날 새벽 계엄군은 병원 건물을 향해 총격을 가한 후 병원 안에 숨어 있는 시민군을 잡기 위해 병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히 포위하고 시민군을 공격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03:00=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시민군은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04:00=계엄군은 도청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금남로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04:10=계엄군 특공대는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했다. 

05:10=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해 시내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을 종료했다. 

06:00=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을 했다. 

07:00=3공수, 7공수, 11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8:50=시내전화의 통화가 재개됐다.  

*전남대병원-쿠키뉴스 공동기획 ‘5·18 시민곁의 그들’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서도 연재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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