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태워지고, 육체는 갈리는 간호사들

보호받지 못하는 나이팅게일들의 절규… 응답 못하는 사회

기사승인 2018-02-21 08: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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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들은 소모품 취급을 받던 영국군 소속 부상병들을 위해 빨래를 하고 사비로 군복과 양말을 사 입히던 현대간호의 선구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표상으로 삼고, 자격시험을 통과해 간호사 업을 시작하며 나이팅게일의 선서를 한다.

선서에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을 것이며, 간호의 수준을 높이고,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며,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나이팅게일을 닮아 환자를 돌보고 생명을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간호사들은 나이팅게일과 같은 영광도, 인정도, 명예도, 하물며 편안한 죽음도 허락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난 16일 민족 대명절인 설날, 6개월 전 서울아산병원에서 나이팅게일의 선서를 하고,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젊은 여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박 모씨는 간호사들 사이에 만연한 속칭 ‘태움’이라는 악습의 피해자였다. 태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임상현장에서 한 치의 실수도 저지르지 못하도록 선배 간호사들이 엄하게 교육하는 과정을 빗댄 말이다.

한 간호사는 태움을 “본래 잡념이나 개인적 사견을 없애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배우고 익힌 데로 기계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방식”이라며 박 씨의 선택을 “선임 간호사가 배정받은 신규 간호사를 도제식으로 가르치는 현실의 폐단”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개인적 성향이나 급박하고 열악한 근무환경이 여성이 다수인 집단에서 벌어진 기 싸움과 결합돼 간혹 육체적, 정신적 가혹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있다”며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의 경우 태움의 강도가 강하다”고 부연했다.

실제 박 씨는 일명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병원, 그 중에서도 응급실과 함께 특히나 태움이 심한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다. 문제는 ‘프리셉터’라 불리는 선배 간호사가 전담해 교육하는 3개월에 추가 3개월의 교육이 이뤄졌지만 일이 손에 익지 않아 퇴사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과 상의 후 퇴사를 결정한 상황에서도 중환자에게 시술된 관을 찢는 사고를 일으켰고, 주변으로부터 타박과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는 등의 압박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수면부족과 끼니거름, 자신을 태운 이들의 이름과 “일하기 힘들다. 안 괴롭혔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휴대전화에 다 남기지도 못한 채 아파트 10층에서 뛰어내렸다.

영혼은 태워지고, 육체는 갈리는 간호사들
◇ 인권침해, 성적·육체적 폭행도 ‘만연’

문제는 안타까운 사연이 박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간호사협회가 진행 중인 ‘간호사 인권침해 실태조사’에 지난해 12월28일부터 1월23일까지 약 1달간 접수된 설문만 7275건에 달했다. 실명으로 피해가 접수된 건만 130여건에 이르렀다.

분석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대부분이 근로기준법, 남녀고용차별, 일·가정 양립 등 노동관계법과 관련된 인권침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근로자가 원하지 않는 근로를 강요하거나 연장근무를 강제했다는 응답은 2477건과 2582건이었다.

연장근로에 대한 시간외근로수당이 지급하지 않은 경우는 2037건, 연차유급휴가를 합리적 이유없이 제한한 경우는 1995건, 유해한 작업환경이나 물질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는 952건 접수됐다.

생리휴가를 부여하지 않거나(926건), 육아휴직 신청 및 복귀 시 불이익을 받았고(648건), 임산부에게도 동의 없이 야간·연장근로를 시켰다(635건). 심지어 응답자의 18.9%가 최근 12개월 내 환자(59.1%)나 의사(21.9%), 환자의 보호자(5.9%)로부터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시달렸다.

최근 12개월 동안 40.9%가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응답했으며, 직속상관인 간호사나 프리셉터로부터 태움과 같은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들이 30.2%로 가장 많았다. 동료 간호사(27.1%), 간호부서장(13.3%), 의사(8.3%)가 가해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간호협회는 “고함을 치거나 폭언을 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일과 관련해 굴욕 또는 비웃음거리를 만드는 등 업무적 측면뿐만 아니라 비업무적인 측면까지 괴롭힘의 범주가 광범위했다”며 “노동관계법 위반 신고건에 대해 구제절차를 진행하는 등 인권침해를 근절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고용노동부 또한 한림대성심병원의 간호사 강제동원사건 후 논란이 된 간호사 처우 및 근로환경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서울대병원, 고려대안암병원, 건국대병원, 동국대일산병원, 울산대병원, 부산의료원 6곳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했고, 모든 기관이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노동부 근로기준정책과 담당자는 “연장근로, 연차휴가 수당, 최저임금 미달, 간호사초임 미지급에 대한 시정조치가 이뤄졌고 해당병원장에 대한 후속조치가 진행되는 단계”라며 “대부분의 병원업계가 조기출근 관행화,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등 문제가 만연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병원물품 구입을 강요하고, 강요 후 임금을 차감하는 등 노동관계법을 위반하는 갑질 문화도 나타났고, 급여에서 차감하지는 않아 법위반은 아니지만 조직문화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드러나 권고조치 할 예정”이라며 “간호협회에서 전달받은 건은 사실 확인 후 사업장 감독에 들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 처우개선 고민하며 하늘만 쳐다보는 정부

정부 또한 일련의 간호사 처우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직접적인 위반사항에 대한 점검과 함께 의료기관 내 간호사들의 처우 및 근무환경 개선을 위한 고민에 빠져있다.

특히 높은 업무강도와 태움 문화 등 열악한 근무환경의 근본적인 원인을 의료기관 내 근무인력 부족문제로 보고, 병원들의 대표단체인 대한병원협회 등 유관단체와 함께 ‘간호인력수급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난관에 부딪쳐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현장에서 근무할 간호사가 충분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이기에 갑자기 자격을 갖춘 간호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한 개선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복지부 관계자는 “현장의 어려움을 해소해야한다는 공감대는 간호계나 병원계 전반에 형성됐고, 임금 등 처우개선이나 관련 수가인상 등에 대한 논의도 마무리 되고 있다”면서도 “일할 간호사를 구하지 못해 원천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어 “태움 문화 역시 충분치 못한 인력 속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긴박함, 피로감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하고 있다”며 “갑자기 하늘에서 간호사가 뚝 떨어지지 않는 한 한계는 있지만 여러 가지 방향에서 논의하고 고민하고 있다”고 개선을 위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에 대해 응급실간호사로 근무했던 조윤미 C&I소비자연구소 대표는 “미국의 경우 수간호사 수준의 신규간호사 전담교육담당자가 임상현장에서의 체계적인 교육을 지속적으로 담당하는 체계를 갖추고, 신규간호사들도 학습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며 교육과 연계된 근무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임상현장에서 요구되는 능력과 학교에서의 교육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들도 많다. 학교 간에도 교육의 질 차이가 심한 부분도 있다”며 “올바른 교육을 통해 신규간호사가 현장에 빠르게 적응하고 일할 수 있다면 보다 나은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한편, 한 복지부 관계자는 “솔직히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나 현직을 떠난 간호사 인력만으로는 사회적 요구를 모두 충족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법이나 직무범위 내에서 간호조무사의 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간호계가 양보해야 하지만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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