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①] ‘남녀’라면서 욕할 때만 ‘연놈’?

기사승인 2018-07-1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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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①] ‘남녀’라면서 욕할 때만 ‘연놈’?

우리 사회는 남성중심에서 양성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다. 속도는 더디지만 꾸준히 진전하고 있다. 성(性)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언어는 예외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 언어는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성차별적 단어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다. 

▲ 운동선수에 ‘아줌마 파워’?…남성에게는 ‘황제’

스포츠 경기 중계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 2016년 8월6일 지상파 방송사 해설위원은 리우올림픽 여자 48kg급 유도 경기 해설 도중 세계 1위 우란체제크 문크바트(몽골) 선수를 향해 “살결이 ‘야들야들’한데 상당히 경기를 억세게 치르는 선수”라고 소개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외모 평가에 시청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또 지난 2월10일 한 해설위원은 평창 동계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여자 15km 스키애슬론 경기 해설 중 이채원 국가대표 선수를 향해 “’아줌마 파워’로 잘해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야들야들’ ‘아줌마’. 엄연히 차별적 의미가 담겼다. ‘야들야들’은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적 속성을 불필요하게 강조한다. ‘아줌마’는 여성 선수를 엄마로만 부각해 전문성을 약화시킨다.

여성 선수에게는 ‘예쁘다’ ‘곱다’ ‘미모’ ‘미녀’ ‘가녀리다’ ‘애교 만점’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는다. 기혼 여성 선수는 ‘아줌마’ ‘엄마’ ‘주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남성 선수에게는 ‘인간탄환’ ‘마린보이’ ‘황제’ ‘전설’ ‘신예’ 등 주체적이고 힘과 능력, 권위가 강조되는 타이틀이 붙는다. 서울YMCA 양성평등 미디어 모니터회가 2016 리우올림픽 중계방송을 모니터링 한 결과 총 26건의 성차별적 발언이 집계됐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총 34건이었다. 

장혜진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 선수는 “미녀 궁사라는 말보다 독기 있는 운동선수, 당찬 선수로 봐주시면 더 감사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딘가 어색한 ‘정숙한’ 남자 ‘늠름한’ 여자

10년 전인 지난 2008년, 국립국어원은 5087개의 성차별적 표현을 발표했다. 그리고 ▲성별 언어구조가 관용화된 것(형제애, 남녀 등) ▲불필요하게 성을 강조한 것(여류명사, 여의사 등) ▲고정 관념적 속성을 강조한 것(앳되어 보이는, 꼬리 친다 등) ▲선정적 표현(쭉쭉빵빵, S라인 등) ▲특정 성 비하(여편네, 부엌데기 등)의 5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남성을 여성보다 앞에 배치하는 구조의 단어는 ‘1남2녀’ ‘자녀’ ‘신랑신부’ ‘장인장모’ ‘선남선녀’ 등이다. 남성을 우선시하는 어순이 관용화된 예다. 남성우위 발상은 비속어에서도 나타난다. 일상적으로는 ‘남녀’가 쓰이지만 욕을 할 때는 여성을 앞세워 ‘연놈’이라고 한다. 또 학교에서 여학생을 야단칠 때 ‘이년’이라고 하지 않고 ‘이놈’이라고 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년’이 ‘놈’보다 모멸적 어감이 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적 속성을 강조한 표현을 살펴보자. ‘걸레’ ‘헌계집’ ‘요부’ ‘음탕하다’ ‘정숙하다’에는 여성은 성적 욕구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담겼다. 남성에 대응되는 어휘는 ‘바람둥이’ ‘카사노바’이지만 비하의 의미는 덜하다. 

국립국어원은 ‘백치미’를 ‘여성은 지성과 외모를 다 가질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강조하는 단어’로 분류했다. 영어권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아름답지만 똑똑하지 못한 금발 여성을 지칭하는 ‘빔보’(bimbo)가 한 예다. ‘노처녀’ ‘올드 미스’는 여성은 결혼과 출산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저출산’은 인구 문제의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남성의 경우에는 어떤 성차별적 단어가 있을까. ‘씩씩한’ ‘용감한’ ‘늠름한’ ‘졸렬한’ ‘대장부’에는 남성은 소심하고 유약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담겼다. ‘점잖은’ ‘과묵한’ ‘무뚝뚝한’에는 남성은 말수가 적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반영됐다.

 ‘기 센 여자’ 아닌 ‘당당한 사람’

‘약한 여자 강한 남자’라는 성별 이분법에 어긋난 경우에는 예외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성차별이 발현된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말 여성해방운동이 대두되며 스스로 자의식을 획득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심이 이 단어를 만들어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또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향해서는 ‘드세다’ ‘기가 세다’고 표현한다. ‘드세다’의 사전 풀이는 ‘힘이나 기세가 몹시 강하고 사납다’로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사회가 만들어낸 ‘강한 남자’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남성은 ‘어좁이’(어깨가 좁다는 뜻) ‘초식남’ ‘부실닭’ 이라고 불린다. 경제적 능력이 남성성의 절대적 요소로 간주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를 가지지 못한 남성에게 ‘백수’라는 비하적 표현을 사용한다. 

1990년생인 직장인 최모(27·여)씨는 어릴 때부터 백말띠 여자는 기가 세서 사주가 안 좋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어느 순간 최씨는 ‘기가 세다’는 수식어가 여성에 국한된 것임을 깨달았다. 최씨는 “한국 사회는 자신감 있고, 할 말은 하는 남자에게는 ‘당당하다’고 하지만 여자에게는 ‘기가 세다’고 한다”고 했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지난 2013년 한 강연을 통해 “사람들은 주도적이고 리더십이 있는 남자에게는 보스(Boss)라고 하지만 여자에게는 기가 세다(Bossy)고 한다”면서 “다음에 누군가 여자아이에게 ‘기가 세다’고 한다면 ‘기가 센 게 아니라 경영자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라”고 언급했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 미국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리 워프가 주장한 언어 결정론이다. 오늘날 언어학이나 인지 과학계 주류에서 받아들여 지는 가설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와 사고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우리 주변의 성차별적 언어. 이대로 방치해도 될까.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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