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08-14 18: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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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의 동상 위쪽에 있는 교회가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성 자일스교회다. 엘리펀트 하우스에서 한 블록이 조금 넘는 곳에 있다. 에든버러의 수호성인인 성 자일스에게 헌정된 교회기도 하다.

교회 중심에 있는 4개의 커다란 기둥은 1124년에 세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분명치 않다. 다만 1385년 화재로 불탄 교회를 이듬해 다시 지었다고 하니, 성 자일스교회의 역사는 적어도 900년에 이른다. 1490년 왕관 모양의 등탑이 추가되고 사제석의 천정을 높였다.

교회의 동남쪽 구석에 있는 티슬예배당(Thistle Chapel)1911년 로버트 로리머(Robert Lorimer)의 설계로 지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랜 티슬기사단(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을 기리는 예배당이다. 제임스7세 왕이 1687년에 만든 티슬기사단은 스코틀랜드의 왕과 16명의 기사로 구성됐다.

예배당의 천정은 엉겅퀴 무늬를 새겼고, 기둥에는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천사를 조각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성 앤드류(Saint Andrew)와 성 콜롬바 그리고 데이비드 1세 왕 등, 스코틀랜드의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1599년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의 열풍이 고조될 무렵, 의회는 존 녹스(John Knox)를 자일스교회의 사제로 임명했다. 1572년 그가 죽었을 때,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아쉽지만 에든버러의 구시가지가 개발되면서 자일스교회의 묘지도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묘지 자리가 주차장이 돼있고, 존 녹스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간단한 표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교회의 북쪽 통로에는 1904년에 스코틀랜드 조각가 피텐드라이 맥길리브레이(Pittendrigh MacGillivray)가 제작한 존 녹스의 청동상이 서있다.

스코틀랜드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지만, 4세기 무렵 솔웨이(the Solway)지역 족장의 아들인 성 니니안(St. Ninian)이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 후반 아일랜드에서 온 성 콜롬바(St. Columba)가 스코틀랜드의 서쪽에 있는 이오나섬에 정착하고 역시 기독교와 켈트 수도원을 전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레고리교황에 의해 597년 켄트(Kent)에 도착한 안드레아 수도원의 어거스틴 원장은 캔테베리의 최초의 대주교에 임명돼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7세기에서 8세기 초까지 아일랜드, 잉글랜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교회가 자리 잡게 됐다.

스코틀랜드의 켈트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교리 등은 같았으나 절차와 같은 경우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코틀랜드가 로마 가톨릭과 일치를 보게 된 것은 마가레트 왕비(Queen Margaret)의 노력에 힘입은 바 있다. 마가레트 왕비는 찬탈자 맥베스(Macbeth)를 격파하고 105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말콤3세의 부인이다.

16세기 무렵, 루터파의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과 쯔빙글리파의 위샤트(George Wishart) 등은 대륙에서 번지던 종교개혁사상을 소개하다가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역설적이게도 헨리1세의 성공회에 반대하고 가톨릭으로 회귀하던 메리여왕 시기에 칼빈주의적 종교개혁을 주도한 존 녹스에 의하여 활발하게 이뤄졌다.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메리여왕도 존 녹스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15608월 스코틀랜드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폐기하고 개혁주의적인 장로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스튜어트 왕조의 권한이 커질 때는 성공회가 대두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갈등이 100여년 이상에 걸쳐 심화됐다.

참고로 성 자일스교회 앞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은 제5대 버클루 공작(Duke of Buccleuch)이자 제7대 퀸즈베리 공작(Duke of Queensberry)이었던 월터 몬태규 더글라스 스콧(Walter Montagu Douglas Scott)이다.

에드워드3세가 1348년에 만든 가터(Garter) 기사단의 일원이었으며, 영국 정부의 전통 관직인 옥새상서(Lord Privy Seal)를 지냈다. 옥새상서는 국왕의 옥새를 관리하고, 이와 관련된 행정 사무를 관장한다. 사실 자일스교회의 뒤편에 의회가 있고 성 자일스교회가 의회광장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스콧의 동상에서 위쪽 길 건너편에는 데이비드 흄의 동상이 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서문에서 그는 인간 과학은 유일하게 다른 모든 과학을 뒷받침하는 과학이라고 주창했다. 이로서 과학은 오직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하는 논리실증주의가 싹트게 된 것이다.

성 자일스교회를 떠난 일행은 과거 천문대가 있던 칼톤힐을 향해 출발했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과 왕립아카데미 뒤로 해서 프린세스 스트리트 정원을 끼고 걸어갔다. 꽤나 먼 거리였는데, 게다가 비까지 내렸다. 저녁 먹을 때 비가 내렸는데도 깜박 잊고 우산을 숙소에 놓고 나와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다.

우산을 살까 했지만, 10분만 지나면 멎을 것이라고 해서 그냥 맞으며 걸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어둠에 잠겨가는 정원 멀리, 에든버러 웨이벌리(Edinburgh Waverley) 기차역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런던에서 동부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철도노선에서 갈라지는 지선의 종점이며, 서부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철도노선의 역시 에든버러 지선의 종점이다. 기차역의 왼쪽으로 고딕양식의 첨탑이 우뚝 솟아있다. 아이반호 등의 소설로 유명한 월터 스콧경(Sir Walter Scott)기념탑이다.

정원에는 그밖에도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시인 알란 램지(Allan Ramsay), 산부인과학의 선구자 제임스 영 심슨(James Young Simpson) 등 무수히 많은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월터 스콧 기념탑은 작가에게 헌정된 기념탑으로는 아바나에 있는 호세 마르티 기념탑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빅토리아 고딕 양식으로 지은 기념탑은 61.11m의 높이이며, 나선형으로 된 288개의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남동부에 있는 로티안(Lothian)주의 서쪽에서 나는 비니(Binny) 사암으로 지었다. 1832년 스콧경이 사망한 뒤 공모가 시작됐는데, 건축가 조지 메이클 켐프( George Meikle Kemp)가 존 모르보(John Morvo)라는 가명으로 제출한 작품이 1839년 최종 선정됐다.

1840년 초석을 놓기 시작해 1844년 가을 켐프의 손자가 머리장식을 올려 완성했다. 하지만 정작 켐프는 기념탑의 완공을 보지 못했는데, 그해 3월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 집에 가다가 유니온 운하에서 추락해 사망했기 때문이다.

준공식은 1846815일 열렸다. 카라라 대리석에 조각한 스콧경의 조상은 조각가 존 스틸(John Steell)의 작품이다. 기념탑에는 스콧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64명의 조각상을 더해졌다. 2명의 여성 조각가를 포함해 모두 15명의 스코틀랜드 조각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에든버러 기차역을 지나면서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칼턴힐(Calton Hill)에 도착할 무렵에는 비가 그치고 구름도 엷어지는 듯했다. 103미터 높이의 칼턴힐은 에든버러의 중심부에 있는 언덕으로 성 앤드류 하우스를 기반으로 한 스코틀랜드 정부의 본부가 있다.

그밖에도 스코틀랜드 의회건물, 홀리루드 궁전(Holyrood Palace)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있고, 국가 기념탑(the National Monument), 넬슨 기념탑(the Nelson Monument), 두갈드 스튜어트 기념탑(Dugald Stewart Monument), 로버트 번 기념탑A(the Robert Burns Monument), 정치적 순교자 기념탑(Political Martyrs' Monument) 등이 있다.

컴컴한 밤이고 시간여유도 많지 않아 기념탑을 찾는 일은 관심 밖이었다. 사실 에든버러의 야경과 멀리 북해에 떠있는 유정의 깜박이는 불빛까지 감상하는 것이 이곳을 찾은 이유였다. 그러나 언덕이 높지 않고, 언덕 앞에 불 꺼진 건물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데다 시내에는 붉을 밝히는 간판이나 조명이 없어 화려한 맛은 없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세계의 도시 야경 가운데 가장 아쉬움이 남을 듯하다. 그나마 오른쪽 항구 건너에는 북해 유전을 나타내는 붉은 등 세 개가 손에 잡힐 듯해서 한참을 바라봤을 뿐이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올라올 거라고 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숙소로 돌아온 것은 1115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정이 여유가 있어 다행이다. 생각해보니 매일 저녁 강행군을 하는 셈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아홉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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