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국가부도의 날’은 어떻게 끔찍한 재난 영화가 됐나

‘국가부도의 날’은 어떻게 끔찍한 재난 영화가 됐나

기사승인 2018-11-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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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 ‘국가부도의 날’은 어떻게 끔찍한 재난 영화가 됐나

소리 없는 울분이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진지한 대화 장면에서는 실소가 나왔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의도한 반응은 아니다. 지어낸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21년 전 사건이 실화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다. 영화 속 맥락이 현실의 맥락과 뒤섞이며 무서운 재난 영화면서 어이없는 블랙코미디, 절대 악과 싸우는 여성 히어로 영화가 됐다.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은 시계를 1997년 11월로 돌리며 시작한다. 당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곧 국가부도까지 갈 수 있는 엄청난 경제위기가 일주일 후 찾아올 것을 예측하고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재정국 차관(조우진)을 비롯한 정부 측 고위 관료들은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 급급하다.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낸 이후에야 내놓은 대책은 IMF 구제금융 신청. 한 팀장은 경제적 주권을 앗아갈 위험성을 경고하며 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결국 1997년까지 왔다. 앞서 1980년대 굵직한 사건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 ‘1987’과 1993년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첩보전을 실화화한 ‘공작’이 개봉하며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점점 현재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건을 냉정히 평가하고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 영화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판단이 선 결과다.

‘국가부도의 날’도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과 같은 부류로 묶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직접 겪은 사건을 소재로 다뤘다. 그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고 현재 어떤 의미로 느껴지는지 그려진다. 주인공 한 명이 아닌 그 당시 있었을 법한 여러 시민들의 입장을 보여준 것도 공통점 중 하나다.

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국가부도의 날’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가상의 인물들을 동원해 IMF 외환위기가 지금 국민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차분히 설득해낸다. 외국인의 눈에 평범해 보일 한국 현대사 영화가 한국인에게 끔찍한 재난 영화로 읽힌다.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명예퇴직과 비정규직 등 이젠 익숙해진 경제 구조의 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국가부도의 날’은 우리가 살고 있는 2018년 오늘이 국가적 재난의 연장선이란 사실을 끈질기게 강조한다.

오랜만에 평범한 역할로 돌아온 배우 김혜수의 존재감이 영화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차가운 조우진과 따뜻한 허준호의 대조도 영화의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마치 현재에서 과거로 타임슬립한 것 같은 유아인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적고 빈약하게 느껴진다. 특별출연한 몇몇 배우들의 깜짝 등장과 좋은 연기는 무겁게 가라앉기 쉬운 영화에 경쾌한 리듬을 부여한다. 오는 28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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