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환 6년 만에 사스 휩쓴 홍콩… 남북 감염병 대비는?

감염병 공습 국경은 없다①

기사승인 2018-12-19 01: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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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남북 간 정부 차원의 상호 교류는 대북 제재 완화라는 관문이 남아있긴 하지만, 인도적 지원 사업의 형태나 경제협력 등 민간의 참여로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2019년 새해를 달군 것은 치사율 90%를 상회하는 신종 바이러스의 공습 소식이었다. 일명 NKCR 바이러스(North Korea-China-Russia Virus)로 불리는 이 바이러스는 공기를 통해 감염되며 약 일주일간의 잠복기를 거쳐 급속도로 확산됐다. 초기 증상은 고열과 두통, 구토, 탈수 등 독감과 유사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전을 통해 수일 내 환자 10명 중 9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바이러스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창궐 추정 지역은 북한, 중국, 러시아의 삼합점(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한 지점)이었다. 3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어 정치적으로 예민한 지역인 탓에 방역이나 역학조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국제보건기구의 공동조사단이 급파됐지만, 3국은 협조에 소극적이었다. 각국은 본국의 바이러스의 창궐지가 아니라는 성명을 내고 인력 유입을 막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방역에 취약한 북한이 최대 피해지가 되리란 것은 처음부터 예상 가능했다. 병은 급속히 북한 전역으로 확산됐고, 최초 발병이 보고된 지 한 달여 만에 남한에 유입됐다. 이후 바이러스는 파죽지세로 남한을 휩쓸었다. 신종 생물학 무기라는 괴담도 돌았다.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냉기류가 조성됐다. 극우 단체들은 연일 도심 곳곳에서 북한 아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측으로부터 메르스 등의 감염병이 북한으로 역 유입되는 경우를 말이다. 취약한 북한의 보건의료 체계하에서 이러한 감염병 대응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위의 상황들은 모두 가정을 전제로 한 ‘소설’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남북은 위와 같은 상황의 발생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염두에 두고 감염병 공동 대응에 돌입한 상태다. 실제로 지난달 7일 남북 보건의료 분과회담이 열린데 이어 12일에도 남북 보건의료 실무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17년 만에 재개된 보건의료 협력 사업은 이제 막 첫발을 뗀 상황이다. 올해 진행한다던 정보 교류도 인플루엔자에 대한 문서 전달이 고작이다. 여기에 교착 상태에 놓인 북미간 협상과 제재 완화 답보 상태 등도 우리 보건당국의 역할론을 더욱 축소시키는 외부 요소로 작용한다. 

남북 간 교류가 막혀있던 지난 10년 동안 북한의 감염병 실상은 정확히 파악되지 못했다. 탈북민 등을 통한 국가정보원과 통일부의 역추적 결과만이 일부 보고서로 남아있을 뿐이다. 복수의 취재원의 의견을 종합하면, 북한의 감염병 상황은 매우 심각하며, 이는 남한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동안 북한이 통제된 국가이며 외부 세계와의 교류가 적다는 점에서 이러한 위협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감염병이 국경을 가릴리 만무하다.

쿠키뉴스는 해외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지난 1일 홍콩으로 날아가 2003년 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이하 사스)의 흔적을 더듬어봤다. 

◇ 사스가 휩쓴 자리

취재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번번이 취재 요청이 거부되기 일쑤였다.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어렵사리 만난 여러 인사들도 취재진에 입을 다물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일쑤였다. 정치적 침묵의 가능성과 함께 홍콩인에게 사스가 얼마나 쓰라린 기억인지를 짐작해볼 뿐이었다. 실제로 당시 299명이 사망하는 동안 홍콩은 부동산과 주가가 곤두박질치며 거리로 내몰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중국 정부는 홍콩으로의 인구 유입을 하루 150명으로 정해놓았다. 홍콩으로 들어오는 중국인 중에는 감염병 인자를 지닌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반환 6년 후인 2003년 중국 광둥성(廣東省)에서 최초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스는 중국의 영향력 하에 놓인 홍콩의 존립을 흔드는 악재로 작용했다. 

재앙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중국의 광둥성(廣東省)에서 창궐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 해 3월 홍콩 구룡반도에 위치한 몽콕의 한 호텔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여기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SARS-CoV)가 처음으로 분리됐다. 치료제는 없었다. 번화한 몽콕의 야시장을 비롯해 도시는 정적에 휩싸였다. 손님이 끊긴 각종 쇼핑몰과 식당들이 연쇄적으로 문을 닫았다. 왕웨이(45·가명)의 부모가 운영하던 식당도 이때 간판을 내렸다.

왕웨이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도 사스에 감염됐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 집계된 1799명의 환자 중 한 명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이후의 홍콩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극도로 심화된 양극화에 왕웨이 같은 서민들은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건강을 염려한 사람들은 추가적인 민간보험을 너도나도 들기 시작하면서 보험사들은 쏠쏠히 주머니를 불렸던 것이다. 

“감염된 환자들이 연이어 사망했다. 환자를 돌보던 숱한 의료진도 희생됐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홍콩인들도 사스라는 위기 앞에서는 홍콩 보건당국의 지시에 잘 따라와 주었다. 정부는 방역 등의 정보공개를 비교적 투명하게 공개하는 정책을 취했다. 무지로 인한 과도한 공포가 대중에게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홍콩 정부 관계자의 귀띔이다. 그가 내게 할애한 시간은 20여분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왜 사스에 관심을 갖는지를 궁금해 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홍콩인에게 사스란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주제다. 기자의 설명을 잠자코 듣던 그는 “만약 치명적인 전염병이 남북을 덮치면 전쟁 이상의 공포가 될 텐데,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기자가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홍콩=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이 기사는 「국민건강 증진 공공 캠페인」 (한국인터넷신문협회-한국의학연구소 주최)에 선정된 기획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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