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독립운동가가 외친 ‘대한독립만세’

[3.1운동 백주년②] 감옥서 고초 겪으며 일제 만행 세계에 전파

기사승인 2019-02-26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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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소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인 바, 다수의 한국인 지기들로부터 그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를 받았을 때 적당한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당시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 모여 대한독립을 부르짖었다. 일제의 부당함에 싸운 민족은 한국인뿐이었을까. 그 틈에서 함께 ‘만세’를 외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독립을 향한 이들의 마음은 한국인 못지않게 절실했다.

1919년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대열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외국인이 있었다. 캐나다 출신 박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의 부탁을 받고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현장을 사진에 담아냈다. 그러나 잠자코 있을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 군경들은 태극기 대열을 둘러싸고 시민들을 향해 경찰도와 맨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스코필드 박사는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자 절규했다. “그 학생은 내 집에서 일하는 학생이오!” “그 여자는 내 집 식모 아이오!” 어느덧 스코필드 박사의 입에서도 “만세”가 터져 나왔다. 그는 일제에 저항해 싸우는 독립 운동가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의 억압은 더 잔인해졌다. 경기 화성시 향남면(현 향남읍)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한 학살이 일어났다. 같은해 4월15일,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제암리 교회에 마을 주민을 모아 집중사격 했다. 이들은 학살 증거를 없애려고 현장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분노했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팔과 다리가 성치 않았음에도 그는 자전거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스코필드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보고서는 중국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의 1919년 5월27일자 기사로 게재됐다. 같은 무렵 스코필드 박사가 제암리 인근 수촌리의 학살을 다룬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비밀리에 해외로 보내져 미국에서 발행되던 장로회 기관지 ‘Presbyterian Witness’ 1919년 7월26일자 기사로 실렸다. 스코필드가 만든 보고서는 일제의 만행이 세계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가 외친 ‘대한독립만세’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규모가 커지면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했다. 김구 등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인사들은 4월11일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 기반이 약하고 언어적 제약 때문에 현지인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는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는 중국 안동(현 단둥)에 위치한 자신의 무역회사 ‘이륭양행’의 건물을 임시정부에 내주었다. 쇼의 회사와 배는 치외법권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륭양행 건물에 교통국을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정부의 자금모집, 국내·외 정보 수집 보고, 정부 지령, 서류 전달, 연락 등을 담당했다. 쇼는 한국 독립 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상해를 오갔던 독립운동가 중 이륭양행 소유의 배를 이용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백범 김구 역시 3.1운동 직후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가 이륭양행의 배인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를 지원한 대가로 쇼는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20년 7월11일, 쇼는 평안북도 신의주 기차역에서 체포됐다. 일본에서 오는 아내와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죄목은 여권 미소지. 일제는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과 함께 쇼를 내란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치외법권 대상인 쇼를 체포하는 것은 위법의 소지가 있었다. 쇼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반발, 쇼의 무죄를 주장했고 일본은 쇼를 석방했다. 쇼의 체포와 석방 과정을 두고 반일감정이 확산됐다. 이를 계기로 일제의 부당한 한국 지배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독립운동가는 광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들에 대한 기념은 미비하다. 쇼의 건국공로 훈장은 지난 2012년이 돼서야 전달됐다.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지난 1950년 외국인 독립운동가 훈장은 가장 낮은 등급인 3등급으로 일괄 평가됐다”면서 “지난 1968년 일부 승급됐지만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외국인 독립운동가가 많다. 국가보훈처에서 그들의 업적을 재조사해 공로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민경 기자 smk503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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