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정몽주,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허구… 단심가 저작도 의심”

기사승인 2019-04-14 09:4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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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정몽주,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허구… 단심가 저작도 의심”“선죽교가 정몽주 살해 장소로 변모한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착한 대나무 다리’라는 선죽교 의미와 조선시대에 유행한 중국 고사 중 죽은 군주를 위해 다리 아래에 숨어 암살을 시도한 자객 예양(豫讓) 이야기가 결합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김인호 광운대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내는 학술지 ‘역사와현실’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정몽주의 신화화와 역사소비’에서 포은은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신화화했으며 그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허구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몽주가 죽은 장소는 자신의 집 근처 태전동으로 추정된다. 16세기 후반에 최립이 지은 시에 선죽교가 정몽주 사망 장소라고 처음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선죽교 설화는 중국 고사를 누군가가 결부함으로써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됐다. 조선 후기 선죽교는 신성한 곳으로 국가의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정몽주가 지었다는 시로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도 실제 그의 저작인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그는 ‘단심가’가 문헌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사례가 1617년 간행된 ‘해동악부’라고 소개하면서 1439년 편찬한 정몽주 문집 ‘포은집’ 초판에는 이 시가 수록되지 않았고 1719년 정몽주 후손 정찬휘가 제작한 포은집 속록에 들어갔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교수는 “단심가 저자에 대한 의심은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일찍이 국문학계에서도 제기됐다”며 위작 여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즉 현대에 정몽주를 충(忠)의 표상으로 인식하는 두 가지 이야기인 선죽교 사망설과 ‘단심가’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창작의 산물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고려 후기에 조선 건국 세력과 대립하다 목숨을 잃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는 충절과 의리를 지킨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주자학 보급에 기여한 삼은(三隱) 중 한 명으로, 빈민 구제와 교육 진흥을 도모했다. 하지만 1392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됐다고 전한다.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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