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기자의 트루라이프] 신연근 할머니의 옹기 인생 60년

기사승인 2019-10-07 0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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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 오롯이 담은 노포(老鋪), 한신옹기-

-핫 플레이스 해방촌의 담벼락 명물-

-50년 넘게 한자리 지켜온 터줏대감-

-헛걸음 손님 없게 365일 가게 문 열어-

-‘서울미래유산선정-

-옹기 할머니 질곡의 삶 구술-

-언제나 긍정 마인드인 옹기할머니-

항아리 사려어~, 김치단지, 깍두기 단지도 있어요!”

가파른 고갯길 넘어 아현동 마을 입구에 항아리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세워놓고 마이크도 없던 시절, 유달리 목청 좋은 남편 한석태(82년 작고) 씨는 골목골목을 돌며 큰소리로 외친다. 그 사이 세 살 터울의 두 딸과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셋째 딸을 등에 업고 남편과 함께 옹기 판매에 나선 아내 신연근(84)은 리어카 한켠에서 젖을 물리고 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말재간이 뛰어났던 남편은 장사를 잘했다. 같은 도매상에서 물건을 가져다 팔아도 다른 도부꾼(봇짐장사, 행상)들은 3~4일 걸려도 못 파는 항아리를 남편은 하루 만에 거뜬히 팔았다. 옹기 도매상들이 남편을 서로 스카웃하려고 애썼다고 신 할머니는 회상했다. 남편과 호흡을 맞춰 열심히 옹기를 판매한 덕에 도부꾼에서 7년 만에 현재의 가게를 마련했다.

반포대교를 건너 남산 3호 터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으로 요즘 핫 플레이스 떠오르는 해방촌 입구 미군부대 담벼락에 큰 항아리들이 열병식을 하듯 길게 줄지어 쌓여 있다. 이름 모를 작가의 설치미술작품처럼 이색풍경이다. 9월 들어서 연이어 불어 닥친 태풍도 거뜬히 이겨낸 길가의 항아리들을 따라 오르다보면 담벼락과 도로 사이에 빨간 3층 건물이 나타나고 일층에 한신옹기간판이 보인다.

 

노포(老鋪) ‘한신옹기60년 옹기를 팔아온 신연근 할머니와 남편의 성을 한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아이러니하게 한신옹기 길 건너편에는 한신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 미래유산간판이 붙어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실생활에 유용한 항아리, 도자기, 찻잔에서 잔잔한 인테리어 소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제품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신 할머니가 24시간 생활하는 가게 한켠의 조그만 방에서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고 있는 셋째 딸 한경인(56) 씨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귀한 손님이 왔다며 주섬주섬 먹거리를 찾아 상에 내놓는 할머니의 인상이 넉넉해 보였다.

여기는 예전부터 동네 사랑방이어요, 어머니는 늘 전기밥솥에 한 솥 가득 밥을 해 놓고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먹이려고 하세요.” 라며 정말 어렵게 살아오셨지만 나누는 것을 좋아하세요.” 딸이 말하자 젊어서 고생안한 사람이 어디 있어! 나 정도면 자식농사 잘 지었으니 내 인생은 풍년이야!” 신 할머니가 바로 결론은 내린다.

신 할머니는 강원도 이천에서 12살에 피난 내려와 삯바느질을 하면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다 22살에 경기도 용인 한 씨 종가 집에 시집왔다. 매달 한두 차례 제사상을 차리고 시집와 반년 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후 내리 딸만 넷을 낳자 복 없는 며느리가 들어왔다며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할머니를 강제로 택시를 태워 친정으로 보냈다. 결국 끝으로 아들 둘을 낳으며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 두부 한모로 끼니를 떼운 적도 많았고 리어카에 항아리를 가득 싣고 산비탈을 오르고 내리다 보니 손과 발에는 늘 피멍이 맺히고 굳은살이 배겼다. 숱한 고생 끝에 자리를 잡을 무렵 술을 좋아했던 남편은 젊은 나이에 어린 6남매를 자신에게 남겨놓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옹기 할머니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음을 다잡았다건축허가가 나지 않아 무허가로 지은 건물은 철거반에 의해 헐리면 억척스럽게 다시 짓기를 20여 차례 반복했다그 사이 아이들과 볕도 들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땅 아래 굴집에서 겨우 추위만 피해 살았다마침내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식 허가를 받아 현재의 번듯한 집을 지었다신 할머니는 일 년 365일 단 하루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다하루도 쉰 적이 없으니 바깥나들이는 당연히 꿈도 못 꾸었다그 힘든 날들의 연속에도 자식들은 스스로 제몫을 다하며 훌륭히 성장해 할머니의 파란 많은 인생에 보답 했다.

팔십하고도 중반에 들어선 최고령 옹기장사 할머니의 인생역정을 귀담아 구술로 옮겨본다.

-질곡의 세월, 옹기 속에서 숙성되어 행복으로 거듭난 신 할머니의 60년 옹기 인생-

 원래 우리 집은 강원도 이천인데 마을 주변으로 뺑 돌아서 강이 흐르고 아주 살기 좋았어,

큰아버지는 이천 인근 세포에서 요리 집을 크게 하셨고 작은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이어서 고향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

전쟁 나기 한해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향에서 두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와 이틀 밤을 몰래 걸어서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동두천에서 잠시 살았지. 말하자면 삼팔따라지야, 그때가 12살 이었어

그 후 어머니는 다시 북쪽 고향으로 가서 전답을 팔아서 이부자리 메고 삼팔선 넘어오다 그만 경비서던 사람들한테 들켜 몽땅 빼앗기고 빈 몸으로 돌아 왔어

그리고는 전쟁이 나서 작은집 식구들이랑 6명이 남쪽으로 피난 나갔다가 동생 둘을 잃어버릴 뻔도 했는데 겨우 찾았지

전쟁 후에는 청량리에서 큰어머니와 삯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동대문시장과 청량리시장에 납품했지밤새워 일한 덕에 돈도 제법 벌었어!”

그러다가 22살 되던 해에 미군부대에 카추사(미군소속 한국군인)로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바로 시댁인 용인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일 년이 백년 같았지! 종가집이라 웬 제사가 그렇게 많은지 손이 빠른 시누이는 나보러 일을 못하다며 매일 핀잔을 줬어,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서 그렇다며 시어머니까지 엄청 구박했지. 남편은 아직 군대에 있고 정말 힘들었어.”

시아버지가 돌아가고 나니 먹고 살기가 더욱 막막해져 남편이 제대하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 그때 돌잡이 큰딸을 포함해 4명의 시동생까지 염치불구하고 친정집에 함께 살았어. 채소 장수를 비롯해 별별 것 다해 봤지만 입에 풀칠하기가 쉽지 않았어. 다행히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안 시댁 친척 한 분이 옹기장사를 추천해줘 60년대 초반부터 옹기장사를 시작한거야.” 

헌 리어카에 도매상에서 항아리를 가득 받아 두 딸은 리어카에 싣고 돌도 지나지 않은 셋째 딸은 등에 업고 그렇게 아현동, 영천, 만리동 등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옹기를 팔았지.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남편이 항아리를 잘 팔아 늘 빈 수레로 내려왔어.”

방 한 칸에 시누이 식구들까지 모두 살았어. 그래도 그때 돈을 잘 벌었어. 은행이 멀기도 하고 은행에서 돈을 떼어 먹는다는 소리도 있어 집안에 항아리를 묻고 거기다가 돈을 모았지. 67년 싼값에 나라 땅을 불하받아 지금의 집터도 구하고 자리를 잡으면서 도부꾼 신세는 겨우 면했지

집터는 구했는데 집을 못 짓게 했어 수 없이 추석 명절 공무원들 쉴 때 몰래 담처럼 쌓은 항아리 뒤로 땅을 파고 방을 만들어 살았어, 환기가 안돼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아이들을 모두 잃을 뻔도 했어!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

한번은 집세를 내러 독 안에 있는 큰돈, 작은 돈을 몽땅 들고 세무서어 갔더니 콧대 높은 담당직원이 어이없다는 듯 수표로 바꿔오라고 해서 겨우 은행을 찾아갔어. 은행에서도 별로 환영을 못 받았어라며 웃었다.

 아이들 어릴 때는 시동생들 것까지 벤또(도시락)9개나 쌌어~ 그리고 나면 줄지어 서서 솥 밑에 남은 보리밥 한 숫가락씩 먹고 학교에 갔어. 밥은 제대로 못 먹였어도 등록금은 꼬박꼬박 보냈어.”

엄마 힘든 거 알고 아이들이 착하게 잘 커준게 너무 고맙지, 안타까운건 술을 좋아한 애들 아버지가 큰 아이 잔칫날 받아놓고 그만 간경화로 하늘나라로 갔어, 그 후 나머지 아이들 키우려고 내가 더욱 억척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어

옹기장사는 신용이 중요하고 정직해야해, 광명단이 한창 판을 칠 때도 나는 이윤이 덜 남아도 숨 쉬는 진짜 옹기만 가져다 팔았지. 옹기 만드는 사람들도 대부분 생활이 어려워 우리는 외상거래 안하고 늘 현금을 주었어. 손님들에게도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신용은 지켰어, 아마 내 아들이 옹기장사를 한다 해도 내가 그동안 쌓아놓은 신용이 있어서 쉬울 거야.”

그리고 항아리 장사는 주변에 인심을 잃으면 절대 안 돼, 맘만 나쁘게 먹으면 밖에 있는 항아리 한밤중에 다 깨고 도망갈 수도 있거든.”

옹기 할머니는 이야기 중에도 서랍장에 자꾸 관심을 보인다.

할머니 서랍장에 뭐가 있어요?”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꼭 보여줄게 있다며 서랍장 안에서 파일 두 권을 꺼낸다. 파일 안에는 각종 상장들이 빼곡히 꼽혀 있었다. 모두 손주들이 받은 상장들이다.

상장이 이거보다 훨씬 많았었는데 집수리 하면서 많이 없어졌어.”

힘들었던 지난날 이야기에 한숨도 내쉬었던 신 할머니의 얼굴에 가족 자랑이 시작되면서 환하게 웃음꽃이 핀다. 목소리도 한결 밝아지고 힘이 넘친다.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살다 살다가 이렇게 똑똑한 아이들은 첨 봐요. 손자 하나는 공부만 했다하면 전교 1등이고 다른 애들은 하나같이 무슨 대회만 나가면 상을 받아와, 큰 딸(한지연) 아들은 고대를 다녔는데 10원도 안내고 학교를 졸업했어. 큰 아들(한재준)은 머리가 좋아서 몇 년 공부하더니 바로 기술사 자격증 땄어, 돈을 잘 벌고 얼굴도 잘 생겼어, 막내아들(한택준)은 큰 호텔에서 근무하는데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뽑혀서 지금 미국에 가있어. 큰 사위는 서울대학 나와서 북한에도 다녀온 유명한 농학박사야, 외손자는 안과의사고 손자며느리는 내과의사야.”

며느리들은 또 얼마나 의가 좋은지 몰라. 둘째 며느리는 시집와서 대학을 다녔는데 여기저기 학교서 막 서로 오라고 했어. 잘은 몰라도 4년 내내 장학금 받고 다녔을 거야. 딸들은 내가 사람 좋아하니까 늘 먹을 거 잔뜩 사와서 방에 쌓아놔

나도 그렇지만 우리 친정 동생들도 이북에서 넘어오고 전쟁 겪느라 제대로 공부할 새가 없었어, 그게 동생들한테 내가 제일 미안하지. 그래도 얼마나 근면성실하고 똑똑한지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에게 다 표창장 받았어!”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틈나는 대로 자식자랑, 손주자랑이 이어졌다. 당연하다. 그 건 지금까지 신 할머니 삶의 버팀목이었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자식들의 염려대로 이제는 좀 편하게 쉬면서 여행도 다니고 하면 좋으련만 이제 서울에서 제대로 항아리 파는 집은 우리 밖에 없어앞으로 장사가 잘될거야, 이게 우리 전통인데 잘 지켜야지, 좀 무겁긴해도 값싼 플라스틱이랑 비교하면 안돼, 그리고 나보려고 왔다가 헛걸음하면 어떡해라며 옹기 할머니는 가게 밖을 나설 생각이 없다.

사실 한신옹기는 유명세만큼 그리 장사가 잘되는 편은 아니다. 가게 밖 옹기들을 배경으로 인증 샷은 많이 찍어도 가게 안으로는 들어오는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내국인 보다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찾아 나선 외국관광객들과 외교관, 미군들이 틈틈이 들락일 뿐이다. 매출이 0원인 날도 있다고 셋째 딸이 귀띔한다.

[곽기자의 트루라이프] 신연근 할머니의 옹기 인생 60년

그래도 긍정아이콘 옹기할머니는 우리의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과 6남매와 시댁 식구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고마운 이곳을 떠날 수 없다. 할머니는 은근히 손재간 좋은 막내며느리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전에 하던 공방도 다시열고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희망한다.

3시간 가까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려하자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없는 반찬이지만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는다. 가족과 주변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신연근 할머니,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넉넉한 옹기처럼 보였다. 담벼락에 길게 늘어선 옹기를 비추는 가을 햇살에 기자를 배웅하는 할머니의 따뜻한 얼굴이 오래도록 반영되고 있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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