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573돌, 말초적 언어유희에 ‘한글은 괴로워’

입력 2019-10-08 11: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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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573돌, 말초적 언어유희에 ‘한글은 괴로워’

“ㄹㅇㅍㅌ. 머리님 엉멍이는 롬곡옾높. 머리님, 문찐 오지구요. ㅂㅂㅂㄱ. 레알 오지라퍼 말넘심 지리구요. 갑분싸, 갑분띠, 아재개그 칠러리맨. 빼박캔트 개짜증.”

직장인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오른 글이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외계언어 같은 말들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또, 어렵사리 한 두 단어 의미를 알아채고 젊은 세대의 언어 유희극에 아는 척하려다 본전이 들통 나면 시대 흐름에 뒤쳐진 아재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외계 언어처럼 보이는 위의 글을 해설서를 토대로 풀어보면, ‘ㄹㅇㅍㅌ’는 진짜 사실이라는 의미다. 한때 유행처럼 쓰이던 레알(Real)에 팩트(Fact)를 더해 모음을 빼버리고 암호처럼 만든 말이다.

머리님은 대리님, 엉멍이는 엉댕이를 말한다. 롬곡옾높은 폭풍눈물을 뒤집어 놓은 말이다. 말인즉슨, 대리님 엉덩이는 폭풍눈물이라는 뜻인 게다. 문찐은 문화를 모르는 문화찐따, 오지구요는 오달지다는 뜻이란다. ‘ㅂㅂㅂㄱ’는 초성만 따온 말로 반박불가라는 말이다. 오지라퍼는 오지랖이 넓어 낄 때와 안 낄 때를 가리지 않는 이를 말한다. 작년 한때는 ‘낄끼빠빠’라는 낯선  신조어도 유행했더랬다. 낄끼빠빠는‘낄 대 끼고 빠질 때 빠져라’를 줄인 말이다. 말넘심은 말이 너무 심하다. 지리구요는 오줌을 지릴 정도라는 뜻이란다. 갑분싸는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 갑분띠는 갑자기 분위기 띠용. 칠러리맨은 아이 같은 직장인을 일컫는다. 빼빤캔트는 영어 캔트(can't)와 결합해 ‘빼도 박도 못하다’는 뜻이다. 개짜증은 10대들이 짜증날 때 하는 말이고, 반대로 좋을 때는 개이득, 개빠름 등의 표현을 쓴다.

해설서를 토대로 해석하면, “진짜로, 대림님 엉덩이는 폭풍눈물. 대리님은 무화를 모르는 진따 오달지구요. 반박불가. 진짜 오지랖도 넓고 오줌 지ff 정도로 말 너무 심해요. 갑자기 분위기 싸늘하고, 갑자기 분위기 띠용. 아재개그에 유치한 샐러리맨. 빼도 박도 못할 만큼 짜증나요.”

언제부턴가 아이들 입에 껌처럼 달라붙은 외계언어. 레알 오지고요, 지리구요. 갑분싸, 갑분띠. 핵인싸. TMI 등등. 문법파괴, 한글파괴가 유희처럼 번지고 있다.

한글날 573돌을 맞아 한글파괴를 걱정하면 젊은 세대의 놀이문화에 괜한 잔소리만 늘어놓은 ‘꼰대’라는 비아냥만 쏟아진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하기 방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급식체’에 온라인에서 단어의 글자를 모양 비슷한 다른 글자로 바꿔 말하는 ‘야민정음’까지 한글파괴는 어느새 일상에 스며들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어린(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해 만든 한글이 장난감으로 치부되고 있는 셈이다. 

젊은 세대들의 한글 유희를 두고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특정 세대만의 언어유희로 만들어진 신조어는 세대 단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부조리의 단면이라는 부정적 의견도 있는 반면, 창조적 해석과 창의적 발상으로 이뤄진 한 시대의 유행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으로 갈려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젊은 세대의 한글 유희에 대한 장년 세대의 걱정과 달리 아직도 우리 생활 곳곳에 남은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바꿔 부르려는 움직임은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의 경제 도발에 자극받은 전북 시·군 지자체에서도 일본식 용어와 외래어 등을 우리말로 순화해 부르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먼저, 순창군은 지난달부터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일본식 용어와 외래어 등 550건을 선정,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기로 했다.
 
이 용어들은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자료를 토대로 선정한 것으로, 일본식 한자어인 ‘고수부지(高水敷地)’는 ‘둔치’로, ‘고지(告知)’는 ‘알림’으로, ‘노임(勞賃)’은 ‘품삯’으로 순화해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리더십’, ‘리플릿’, ‘세미나’ 등 자주 사용하는 외래어는 ‘지도력’, ‘광고지·홍보지’, ‘발표회·연구회’와 같은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할 방침이다.
 
주군의회에서 현재 운영중인 자치법규 내용 중 어려운 한자어를 비롯한 일본식 표기 등 어렵고 어색한 용어가 사라진다.

완주군의회도 자치법규에 나오는 어려운 법률용어를 일괄 정비하는 내용을 담은 ‘일본식 한자어 등 용어정비를 위한 완주군의회 회기와 그 운영에 관한 조례 등 일부개정조례안’등을 통해 일본식 한자어 표현을 우리말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전주시도 일제 잔재로 남은 ‘동산동’ 행정동 명칭을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여의동’으로 바꾸고, 일본식 한자어 표현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동산동은 1907년 미쓰비시 기업 창업자의 장남 이와사키 하시야(岩崎久彌)가 자신의 아버지의 호인 ‘동산(東山)’을 따 창설한 동산 농사주식회사 전주지점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산리’로 변경된 후 100년 넘도록 지명이 이어져왔다. 시는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일제 잔재인 동산동의 명칭을 여의동으로 교체했다.

언어학자들은 “젊은 세대들이 놀이로 즐기는 한글파괴는 동시대 문화와 세태를 반영한 일시적 유희로 시간이 지나면 한 때의 유행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는 대부분 소멸한다”며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겨 100년이 넘도록 우리 일상에 뿌리박힌 일본식 한자어와 일본어 표기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꾸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주=박용주 기자 yzzpar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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