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정권이 대일관계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세 가지 이유는?

기사승인 2019-10-21 08: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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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정권이 대일관계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세 가지 이유는?문재인 정부의 대일외교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지 궁금하다. 그 계기는 오는 22일 개최되는 나루히토(德仁) 일왕(제126대)즉위 행사에 문 대통령을 대신하여 이낙연 총리가 참석하는 것이다.

일왕 즉위식에는 한국을 포함해 194개국이 초청장을 받았고 174개국이 초청에 응해 참석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일본 정부 인사, 외국 원수급 인사 및 사절단 등 2000여 명이 참석한다. 외국 내빈은 400여 명이 참석한다. 이 행사에 우리나라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하기로 했고 이 총리는 24일 오전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와 약 10여 분간 면담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로의 통역을 빼면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총리와 아베 총리와의 면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점은 이 총리가 문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만난다는 사실이다. 문 대통령의 친서에 어떤 내용이 얼마나 적혀 있을지는 봐야 알겠지만, 과연 일본 측에서 문 대통령의 친서 내용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고 믿어 줄 것인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 총리가 아베 총리와의 3분 면담에 문 대통령의 친서가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은 문 대통령을 쉽사리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금의 칡넝쿨처럼 얽혀있는 복잡한 한일관계가 쾌도난마처럼 단숨에 해결되리란 기대는 금물이다.

현재 한일 양국은 다음의 세 가지 문제에 있어서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징용피해자 위자료 문제이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 대법원이 징용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한일관계를 급격하게 악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징용피해자 위자료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 기업이 한국 기업과 공동으로 기금 조성에 참여해 피해자에게 지급하자”고 주장하는 반면에, 일본 정부는 “징용문제는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기업의 배상금 지불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한일관계의 두 번째 현안은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이 한국으로 수출하는 전략물자를 규제하는 것은 우리의 대법원이 징용 피해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부당”하다는 생각인 반면에, 일본 정부는 “전략물자의 제3국 유출 우려에 따른 조치로 역사문제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문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일명 지소미아(GSOMIA) 문제이다. 지소미아 문제에 대해서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했지만, 협정은 11월 22일까지 유지된다는 점에서 일본이 먼저 수출 규제를 해제하면 우리 정부도 지소미아를 연장할 수 있다는 입장인 데 반해, 일본 정부는 “지소미아를 파기해도 일본 방위에 큰 지장은 없으며 지소미아 문제는 경제 조치인 수출 규제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이낙연 총리는 이번 방일을 계기로 문 대통령과 아베 수상 간의 11월 정상회담을 위한 다리 역할을 자임한 모습이다. 물론 최근들어 한일간의 관계회복을 위한 문 대통령의 노력이 조금씩 눈에 띈다. 그것은 지난 12일 일본 열도를 강타한 초대형 태풍 ‘하기비스’로 일본에서 사망 및 실종자가 무려 40명 이상 발생한 데 대해, 문 대통령이 지난 14일 아베 총리에게 위로 전문을 보낸 데서도 드러난다. 청와대에서 발표한 위로 전문의 내용은 이렇다. “(문 대통령은) 태풍으로 다수의 소중한 인명이 희생되고 막대한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에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아베 총리와 일본 국민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다”고 했다. 또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와 국민이 합심해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고, 피해를 본 많은 국민이 하루속히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18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개최된 주한 외교단 초청 리셉션에서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 대사 부부와 약 2분 20초 동안 대화를 나눴다.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고 악수만 하고 스쳐 지나가는 리셉션 인사치고는 꽤 긴 시간을 대화한 것이다.

그동안 문 대통령이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면서 대일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지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 대통령은 느닷없이 임진왜란 당시 왜구를 섬멸한 이순신 장군을 노래하고 부산 ‘거북선 횟집’을 찾아가 생선회를 즐기는가 하면, 이순신 장군이 왜구를 물리쳤던 해승(海勝) 전투장을 찾아다니며 강론을 펼쳤고, 그의 최측근이었던 청와대 핵심 참모는 동학의 죽창가를 부르면서 토착 왜구를 초토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여기에 주한미군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영토분쟁에 빠져 있는 ‘독도 수호 훈련’을 한국군 단독으로 강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주적(主適)개념을 북한으로부터 54년 동안 자유민주주의 최우방국으로 함께 해온 일본으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대일 적대 정책의 백미(白眉)라 볼 수 있다.

그러던 문 대통령이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대일(對日)
태도를 바꾸는 것일까? 일본에 대한 문 대통령의 근본적인 생각이나 정책이 바뀐 것인가? 결론은 세 가지이다.

첫째, 내년 4월 총선이 다가옴에 따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내년 4월 총선의 핵심 이슈는 경제이다. 그런데 지금 피부로 느끼는 우리 국민들의 경제체감지수는 IMF 경제환란 직전의 상황 못지않다. 그리고 얼마 전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보다 0.6% 포인트나 낮춰 발표했다. IMF는 지난 15일 ‘세계 경제 수정전망’ 보고서를 내고 올해와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각각 2.0%, 2.2%로 전망했다. 한국경제에 먹구름을 예고한 것이다. IMF는 성장 전망이 급격히 나빠진 배경으로 특히 “한국과 일본이 서로에 대한 수출 규제로 무역정책의 불확실성과 장벽이 높아졌다”며 “지금까진 별 영향이 없을지라도 긴장이 고조되면 양쪽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곧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결국 한국경제를 침몰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IMF가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문 대통령이 대일관계의 태도를 급회전한 이유는 내년 4월 총선에 악재로 다가올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라도 한일관계의 회복을 통해 일본의 경제규제를 완화시켜 경제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국내정치적 요인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삼성과 현대를 찾아다니는 것도 모두 이런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아울러 일본과의 적대관계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높아졌고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로서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큰 수출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경제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실질적인 경제정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렇듯 문 대통령의 대일관계에 대한 태도 변화는 내년 4월 총선을 의식한 즉흥적인 처방전에 불과할 뿐, 새로운 한일관계의 공고화를 위한 근본적인 정책적 변화라고는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을 일본은 훤히 꿰고 있을 것이다. 70년을 쌓아온 한일관계를 하루아침에 무시해 버리는 대일 적대 정책의 당사자가 느닷없이 미소를 품고 접근한다고 해서 일본이 변했다고 생각할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의 대일 정책과 전략이 크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문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북한의 시침(時針)에 따라 움직이는 분침(分針)이나 초침(秒針) 정도로 해석된다. 김정은은 최근 북한에 놓을 고속철도로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을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갖고 일본 측과 접촉 중에 있다. 그리고 북한은 일본의 속내를 떠보기 위한 전략으로 북한과 일본이 서로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ZZ:Exclusive Economic Zone)이라고 주장하는 동해 대화퇴어장에 대형 어선들을 자주 보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북한 대형 어선과 일본 수산청 어업 단속선이 충돌하여 북한 어선이 침몰한 사태가 발생했지만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은 현장에서 북한 승무원 60명을 전원 구조했다. 지금 북한은 이런 식으로 일본과 접촉을 하면서 일본의 속내를 살피고 있으며, 이미 일본과의 상당한 관계진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북한의 이런저런 움직임은 문 대통령의 대일 행보도 이에 보조를 맞추는 쪽으로 가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물론 지소미아 파기로 미국의 대(對)중국 봉쇄전략의 핵심축인 한·미·일 삼각안보 축에 균열이 생긴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미국이 우리 정부를 향해 일본과의 지소미아 원상회복을 요구한 것도 문 대통령의 대일 태도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문 대통령의 반일 감성 투쟁을 통한 한일 갈등 극대화 전략이 내년 총선에서 오히려 불리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이다. 지금의 악화된 대일관계는 집권 여당인 민주당 산하 민주연구원의 보고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일본과의 적대적 관계를 끌고 가는 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다는 분석에 근거한 정치적, 전략적 필요성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일본과의 적대관계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내년 총선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면서, 이는 완전히 정무적 오판(誤判)으로 판명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 대통령은 외교 문제를 국내정치의 수단으로 악용하거나 북한의 의중에 맞춰 우리의 국익을 침몰시켜서는 안 된다.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은 대한민국 3대 기둥인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시장주의, 군사 안보적으로 미국과의 동맹의 가치를 공유한 최우방국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4년 동안 쌓아온 외교적 급자탑을 모래성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일관계는 거두절미하고 김대중-오부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필자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재직할 당시인 지난 1999년 일본 외무성 초청으로 방일(訪日)하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일본 총리와 나눈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한 대담 내용을 소개한다. 이 대담이 지금의 악화된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당시 언론에 게재된 대담 내용 관련 링크를 공유하고자 한다.
장성민 세계와동북아평화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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