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성읍 민속마을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열일곱 번째

기사승인 2019-11-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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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정상만 바라보고 오르다 지쳐 잠시 쉬면서 뒤돌아보니 올망졸망한 오름 너머 바다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45년 전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만나 지금까지 그 인연을 이어온 한 친구 부부가 제주에 와 함께 3일을 머물고 갔다. 그는 내가 평생 닮고 싶어 한 여섯 친구 중의 하나다. 그 여섯 친구들은 하나같이 필요할 때는 확신에 찬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 늘 걱정이 많고 결정은 빠르지 못한 나는 지금까지 그들 뒤를 따라 배우며 살아왔다. 3일이기는 하지만 저녁 늦게 와서 꼭두새벽에 떠났으니 함께한 시간은 꼬박 하루다.

한라산에 오르니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 옆에서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다. 백록담에 커다란 물웅덩이 자국이 둘 보이는데 물은 거의 마르고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던 여남은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저기 노루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위치를 설명한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사진으로 찍어 확대해 보니 정말 노루 두 마리가 거기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튿날 성판악휴게소에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7시쯤 걷기 시작했다. 제주에선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단풍을 보았다. 고도가 높아지며 단풍의 색이 달라지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고 서로의 안색을 살피며 백록담까지 올랐다.

성읍민속마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3294)은 조선시대부터 1914년까지 500여 년 동안 정의현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성읍민속마을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듯 수령 수백 년의 고목들이 근민헌을 호위하고 있다.

내려오는 길은 더욱 힘들었다. 통통 튀듯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걸었다.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고 더 이상 우리를 앞지르는 사람도 없어졌다. 뒤 따르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천천히 걷기에 집중하며 말없는 시간이 흘렀다. 저 앞에 주차장이 보였다. 아직 한라산 백록담을 다녀올 만한 체력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 이 먼 길을 걸을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눴다.

근민헌은 정의현감이 집무하던 관청이며 197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다음날 새벽에 공항에 내려주고 집에 와 다시 잠들었다가 깨었는데 서울에 도착한 그에게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몸은 정말 힘들었지만 마음은 행복한 하루였다.’ 이 부부와 함께 행복을 나누었다.

정의현 객사는 정의현감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에게 배례하는 장소이자 중앙의 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무는 숙소였고, 경로잔치나 연회 장소이기도 했다.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은 참으로 매력적인 자리였다. 그저 세 사람의 비서 중 하나였을 뿐인데 직책 명칭 덕을 많이 보았다. 어느 날 중학교 담임선생님 댁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근처 의원에서 복부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단다. 60 평생 건강하게 살아왔고 퇴직 후 2년 동안은 국내외의 유명 관광지를 바삐 다녀도 크게 피곤함을 느끼지도 않을 정도였는데 큰 병원에 가 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혼비백산하신 듯했다.

정의읍성 서문 근처의 정의향교는 1738년(영조 14)에 창건되었다.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날 입원하고 최대한 빠르게 검사하고 수술까지 마쳤다. 입원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술 후에는 달리 추가 치료가 필요하지 않아 상처가 아물면서 바로 퇴원 결정이 났기 때문이었다. 수술 후 건강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의학적으로 드문 사례여서 관련 학술지를 통해 논문으로 학회에 보고까지 되었다.

정의읍성의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의 중심 도로는 매우 넓어서 성내로 자동차가 드나든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 운행을 통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듯하다.

퇴원하는 날 오전에 병동 간호사실에서 연락이 왔다. ‘병실에서 환자분께서 찾으시니 내려오시라’는 말을 듣고 내려가 보니 선생님은 이미 퇴원 준비를 다 끝낸 뒤였다. 널 보니 참 대견하다고, 네 덕분에 새로 인생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간호사들이 얼마나 친절했던지 감동받았다고 하시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준 봉투엔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환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네 선생이 주는 것이니 받아야 한다. 그 상품권으로 사 입은 양복은 아직 집에 걸려 있다. 더 이상 몸에 맞지 않아 입지는 못한다.

성읍민속마을에 있는 상당수의 전통가옥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벽의 흙이 떨어져 나가 수리가 필요한 집이다. 제주의 전통 가옥은 돌, 나무, 흙, 억새풀 등으로 지어 헐어내도 전혀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다.

퇴원 후 선생님은 하던 일 그만 두고 바다가 있는 작은 도시로 이사했다. 어느 날부터 연락처가 바뀌었다. 나는 살아내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오랜 시간 잊은 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역 신문에 그곳 복지관을 소개하는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 복지관을 통해 연락처를 다시 받았다. 여전히 건강한 목소리다. 좋은 인연은 어떻게든 때가 되면 다시 이어진다.

제주의 담은 밭담, 산중의 잣성, 민가의 돌담까지 특별한 기교 없이 비슷한 크기의 돌들을 쌓아 올렸을 뿐인데도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고 송악과 담쟁이를 키운다.

제주에서 과거의 마을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은 표선에 있는 제주민속촌과 성읍민속마을이 대표적이다. 표선 바닷가의 제주 민속촌은 용인의 민속촌과 유사하며 성읍민속마을은 순천의 낙안읍성과 닮은꼴이다. 세화에 있는 해녀박물관, 제주 시내의 국립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등에서도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실내에 재현해 놓은 모습만으로는 현실감이 떨어진다.

흙보다 돌과 바위가 더 많은 제주에선 나무가 돌과 바위를 밀어내지 않고 제 살 속에 품으며 크는 모습을 흔히 본다.

아산의 외암민속마을과 순천의 낙안읍성을 떠올리며 성읍민속마을을 찾아갔다. 길가에 초가집이 나타나고 ‘흑돼지 구경하는집’과 같이 지나가는 손님을 붙들기 위한 여러 가지 문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성읍민속마을인가 생각했지만 내비게이션에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북쪽의 성문을 지나 남쪽으로 빠져나가니 비로소 성읍민속마을 주차장이다.

읍성 동문 위에서 내려다 본 한봉일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 71호)은 헛간과 쉐문간 (외양간)을 가진 이문간 (대문간)과 그 안으로 오른쪽의 안거리 (안채)와 왼쪽의 밖거리 (바깥채)로 이루어져 있다.

공식적으로는 정의읍성 안쪽의 마을이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성 밖의 마을도 성 안 못지않게 많은 볼거리를 준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또한 주차장 근처에는 저자거리 형태로 식당과 카페, 기념품 판매점 등 다양한 상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작 성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렇다 할 상점은 보이지 않았다.

한봉일 고택의 이문간 옆에는 범상치 않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팽나무와 후박나무로 생각되는 두 종류의 나무가 한 몸이 되어 자라고 있다.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이후 1914년까지 500여 년 동안 정의현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을 중심으로 안과 밖에 전통 가옥과 관가, 객사, 향교 등 옛 마을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제주의 과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주민들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을 모습은 많이 변했다.

성읍민속마을의 근민헌 맞은편에는 수령 600 년으로 추정되는 폭낭 (팽나무)이 아직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성읍민속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정의읍성은 진사성이라고도 하는데 둘레 1.2 킬로미터, 높이 3미터 규모의 성으로 조선 세종 때 돌로 쌓았다. 현재는 동문과 서문 그리고 남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차가 드나들고 있어 성곽 전체가 다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성 안의 관청으로 정의현감이 집무하던 근민헌(近民軒)과 객사가 있는데 근민헌은 1975년 복원되었다. 객사는 지방관이 임금에게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는 장소이자 중앙의 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무는 숙소였다. 또한 경로잔치나 연회 역시 이곳에서 개최했다.

팽나무 거목에 야생란의 한 종류인 석곡이 터를 잡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때마다 꽃을 피워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낼 것이니 사람들은 이 팽나무를 그 향기로 기억할 것이다.

근민헌 맞은편에 천연기념물 제 161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고목이 성읍마을의 500년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에는 누군가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 자생하는 착생 야생란인 석곡과 풍란을 붙여 놓았는데 꽃이 피어 은은한 향이 날릴 때면 방문자들의 발걸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듯하다. 나무도 늠름하고 멋진데 난향을 품고 있으니 한층 더 기품이 있어 보인다. 제주의 전통 생활상을 보기 위해 갔는데 정작 기억에 남은 것은 석곡과 풍란을 키우고 있는 600살의 팽나무였다.

근민헌 앞의 팽나무 거목엔 석곡 말고도 풍란도 여러 포기 보인다. 누군가 이 나무에 부착해 놓은 듯한데 습도와 온도가 자라기에 알맞으니 뿌리를 튼튼하게 뻗으며 포기가 커졌다. 풍란은 1cm 크기의 작은 꽃을 봄에 피우는데 달콤한 향이 일품이다.

동문 옆에서 본 나무 역시 기억에 남는다. 동문에 올라 오른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남서쪽 방향으로 성읍민속마을의 여러 초가지붕이 잇대어 있는 듯 보이는 곳이 있다. 서쪽에 해라도 지고 있으면 저쪽 어디선가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듯 옛 기억을 부르는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그곳에 묘한 고목이 있었다. 나무는 한그루인데 잎이 퍼진 모양이 달랐다. 처음엔 송악이나 담쟁이덩굴 또는 다른 어떤 덩굴이 기어올라 잎이 무성한 줄로만 알았다. 그 나무 아래에 국가민속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봉일 고택이 있다. 고택 문 앞에 서서 바라보니 팽나무와 후박나무로 생각되는 서로 다른 두 나무가 얼핏 보였다. 뿌리는 물론 나무의 둥치부분에서부터 두 나무는 완전한 한 몸이 되어 자라면서도 가지와 잎은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성읍민속마을의 남문 밖에는 공용 주차장이 있고 이 근처에 식당과 카페를 비롯해 각종 상가가 옛 저자거리 형식으로 들어서 있다.

한봉일고택은 19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문간은 한쪽에 헛간, 다른 한쪽엔 외양간 (제주에서는 ‘쉐막’이라 한다)이 있다. 문간을 들어서서 보면 마당 오른쪽에 안채 (안거리), 왼쪽에 바깥채 (밖거리)가 있다. 제주의 전통가옥은 통상 가난하거나 식구가 적은 경우 안거리 한 채만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 안거리 맞은편에 밖거리를 마주보게 짓는다. 안거리에는 통상 부모가 산다. 아들이 결혼하면 아들내외는 밖거리에 살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가 안거리를 아들내외에게 물려주고 밖거리에 살기도 한다. 안채에는 부녀자가 살고 대문 근처 사랑채에는 남편이 기거하는 육지의 양반가옥과는 개념이 다르다.

어느 카페 앞에 나무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일억천오백만 년 전 제주의 마고할머니가 반고에게서 나온 금벌레와 은벌레를 이 나무에서 키웠는데 두 마리의 벌레는 1억년 동안 이 나무에 구멍을 판 끝에 만났단다. 금벌레는 남자가 되고 은벌레는 여자가 되어 사랑을 이룬 이 나무 구멍 속에 사랑하는 남녀가 손을 넣고 마주잡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며 연인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성읍민속마을의 집은 대부분 19세기 말에 지어졌지만 제주 전통가옥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제주의 집은 가족이 늘어나면 안거리를 마주보는 밖거리를 짓고, 더 늘면 모거리를 지어 ㄷ자 집이 된다. 집이 더 필요하면 더 필요하면 모거리를 하나 더 지어 ㅁ자 형태가 된다. 이 과정을 마을 곳곳의 고목들이 바라보며 긴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가고 나무만 남았다. 지나가듯 찾아온 사람들은 고목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짐작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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