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함덕 해변의 서우봉

기사승인 2019-12-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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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동백이 12월 마을마다 집집마다 담장에 한 두 그루씩은 자라며 붉은 꽃잎을 떨구고 있다.

제주도 1년 살기를 시작하고 반년이 지나간다. 주위 사람들에게 제주도에 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말했었다. 제주도는 마음속에 두고 있는 10년 동안의 국내여행 계획 중 첫 번째 여행지다. 무엇을 얻고자 제주도 1년 여행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많이 얻었다.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지난 7월에 왔을 때는 숲길 5 km 걷기가 쉽지 않았다.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 길을 집중해서 걷고 나면 피곤함과 함께 발목 통증 때문에 며칠은 걷기를 쉬어야 했다. 편안한 길을 조금 길게 걸으면, 이번엔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그 핑계로 또 며칠을 집에서 지냈다. 지금은 10km 쯤은 어렵지 않게 걷게 되었다.

산국은 제주의 산과 들에서 가장 늦게까지 볼 수 있는 꽃이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한 여름 연한 삼색의 에메랄드 바다색도, 겨울의 짙푸른 바다색도, 그 위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의 흰색도 아름답다.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구름, 아침과 저녁으로 집에서 바라보는 동쪽과 서쪽의 붉은 기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검은 밭 가장자리에 칭칭 둘러선 밭담과 그 밭담을 붙들고 뻗는 송악과 담쟁이도 아름답다. 길가에 불쑥 나타나는 철늦은 들국화와 진저리 치듯 꽃잎을 떨구는 붉은 애기동백 그리고 편안한 초록이 철철 넘치는 당근 밭을 보며 행복을 실감한다.

잔대꽃은 7월과 8월에 피는 여름 꽃이나 제주에서는 12월에도 양지바른 곳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퇴직휴가 기간을 포함해 1년이 넘도록 한시도 곁에서 떨어진 적이 거의 없이 생활했어도 아내와 내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살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을 여행하며 세상을 함께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함께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늙어서는 그 때까지 보고 사진으로 남겨둔 장면들을 다시 들추며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제주의 길을 걸으며 10월 중순경 감자 꽃을 본 적이 있는데 12월에도 감자꽃은 피고 있었다. 1월에 캐는 감자라 생각하며 순한 아름다움에 빠졌었다.

이젠 아이들 키우던 시절의 기억이 언제라도 새로운 나이가 되었다. 어느 여름날 아이들과 셋이 저녁을 먹는데 아들이 영어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보니 영어학원에 버스시간이 가까웠더란다. 버스 놓칠까봐 한달음에 달려 집에 와서 학원 수업가방을 집어 들고 뛰어 버스 서는 곳에 가니 이미 학원버스 시간이 지나서 혹시나 하고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라고. 학원버스를 놓쳤다고 생각하고는 학원까지 부지런히 뛰어 갔다고 한다. 그 여름날. 그때 살던 집에서 영어 학원까지는 어른이 걸어도 30분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제주도 동쪽 김녕에서 세화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밭이 모래로 되어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세월 바람에 날려 온 고운 조개껍질 가루가 켜켜이 쌓인 지대이다. 이런 이유로 거문오름에서 흘러내린 용암의 작용으로 시작된 용암동굴 내부에 이들 조개껍질의 칼슘 성분을 녹인 빗물이 스며들어 석회암동굴에서나 볼 수 있는 종유석 등을 형성하는,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문 자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구좌읍 평대리는 이러한 모래땅을 기반으로 우리나라 최대 당근 주산지 중의 한 곳이 되었다.

“그렇게 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아빠?”
“학원 수업이 절반쯤 지났으니 선생님이 ‘왓즈업?’ 하지 않았을까?”
“아냐. 학원 쉬는 날이었어. 흐흐.”
“모르고 있었어?”
“그 전날 수업 끝나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놀다가 깜빡했지.”
“올 때도 걸어온 것 아니지?”

인동덩굴의 꽃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5~6월에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러나 12월에 제주의 길을 걷다가 이 꽃을 보았을 때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았다.

아들은 어렸을 적 집중력이 참 좋았었다.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면 모든 것 다 잊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밥 먹는 것도 마다하곤 했다. 때론 말을 해도 전혀 듣지를 못했다. 이것 때문에 사단이 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퇴근해서 저녁 준비를 끝냈는데도 아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가까운 놀이터엔 없었다. 다른 놀이터에도 없었다. 상가의 PC방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밖의 PC방에서도 찾지 못했다. ‘교통사고일까’ 하는 생각에 근처의 여러 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했는데도 없었다.

함덕 해변은 모래가 희고 고우며 물이 깊지 않아 누구나 어려움 없이 맑은 바닷물을 즐길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곳은 문방구였다. 거기 앞에 아이들이 쪼그려 앉아 동전을 넣고 게임하는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그날 아들은 거의 4 시간이나 게임을 했었다. 늘 가던 정문 옆 상가의 문방구가 아니라 후문에서. 그날은 내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었다.

아직은 굳이 땀 흘리며 꼭대기까지 오르는 관광객은 거의 없는 곳이 서우봉이다. 여름날 사람들은 그 아래 펼쳐진 함덕 해안의 고운 모래와 맑은 물을 즐기다 어두워지면 화려한 전등이 불을 밝히는 시원한 식당, 주점, 찻집에서 바다와 서우봉을 바라볼 뿐이다. 이른 아침과 해질녘에 이 봉우리를 부지런히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든 주민들이다.

물놀이 철이 지난 뒤에도 함덕 해변은 서핑, 패러글라이딩 등 다양한 스포츠 활동이 끊이지 않는다.

서우봉은 함덕과 북촌 사이에서 북쪽 바다로 불쑥 돌출된 해발 113 미터의 오름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과거엔 서모 또는 서모오름, 서모롬 등으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서산(西山), 서산악(西山岳) 등의 이름을 얻었다. 조선시대에 서모오름의 북쪽 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면서 이 봉수를 서산봉이라 했는데 조선 후기부터 서우봉(犀牛峰)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서우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원래 이름은 아니다.

함덕 해변은 가까이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호텔들이 줄지어 있고 각종 식당과 카페 등이 밀집되어 있어 늘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휴양지다.

서우봉은 한 시간쯤 무리하지 않고 산책하기에 좋은 바다 경치와 숲을 갖추고 있다. 19번 올레가 함덕 해변을 지나 이 봉우리를 넘어간다. 또 함덕리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해안길, 둘레길, 정상에 이르는 산책로 등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개발 및 관리하고 있다.

고려시대 함덕포는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상륙해 삼별초를 전멸시킨 곳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가 몽골과 강화(講和)해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대항해 항쟁했으며 이곳 함덕에서 최후를 맞았다. 모래언덕 위에 작은 전적비가 그 비극적인 역사를 알리고 있다.

조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서우봉 오르기를 시작하기 전 오른쪽에 허물어져 가는 가마가 눈에 들어온다. 기와를 굽던 와막밧이다. 길이 11m, 높이 166cm, 넓이 280cm의 이 가마는 기와를 지금은 불을 넣던 화구부분을 포함해 앞부분 약 2.4m가 훼손된 채 거의 방치되어 있다. 이 가마에 대한 안내문이라도 없었다면 아무도 여기가 기와를 구웠던 곳임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우봉 아래 산책로 입구에 있는 길이 11m의 기와 가마 와막밧은 주로 암키와와 수키와를 굽던 곳이라 한다. 불은 넣던 화구부분을 포함해 약 2.4m는 멸실된 상태다. 한여름 수풀이 우거지면 가마는 거의 보이지 않아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마터 뒤엔 집터를 닦고 있는지 축대를 튼튼하게 쌓아 평지를 만들고 있다. 함덕 해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다. 해안을 따라 난간이 있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바다 가까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이다. 아직은 미완인 듯 멀리 가지 못하고 길이 끝난다. 이 길 끝에서는 서우봉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리며 굳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갖가지 모양의 바위를 살필 수 있으니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서우봉엔 함덕리에서 조성해 관리하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짬을 내어 제주의 숲길을 체험해보고자 한다면 서우봉의 산책로를 한 시간쯤 걷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울창한 곶자왈까지는 아니라도 한 여름엔 생명이 충만한 제주 숲의 속살을 볼 수 있다.

서우봉으로 오르는 길은 잘 닦인 시멘트 포장도로다. 한발자국 오를 때마다 함덕 해변과 바다가 조금씩 넓어지며 눈에 들어온다. 관광객들 중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저녁때면 중턱의 정자까지 와서 함덕 해변과 저 멀리 지는 해를 즐긴다. 중턱이라고는 하지만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정자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오른쪽으로 난 산책길이 나타난다. 이 산책길을 따라가면 일제 말기에 구축한 동굴진지가 있다. 산책로는 잠시 아름드리 소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덩굴이 우거진 숲을 지나 서우봉 둘레길로 연결되는데 이 길을 따라 서우봉 정상 부근을 한 바퀴 돌며 한 시간쯤 숲과 주변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서우봉 정상 부근의 전망대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함덕 해변의 풍경이 아름답게 보인다.

서우봉은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오름으로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면 제주의 울창한 숲이 압도적인 곳이다. 특히 올레길 표시를 따라 가다 보면 한 순간 숲속으로 풍덩 빠지는 느낌이 든다. 한 여름에는 나뭇잎과 풀잎이 우거져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이 길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한낮에도 으스스할 정도로 어둡고 습도조차 매우 높아 걷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적당한 햇빛 속에서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서우봉 전망대에선 함덕 해변 뿐 아니라 해질녘의 석양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굳이 전망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우봉에 오르는 길 어디서든 해지는 풍경은 아름답다.

숲을 벗어나면 함덕 해변은 물론 한라산과 멀리 서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위의 오름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이른다. 말과 염소 등 가축 방목지 상단에 위치한 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일품이다.

이곳에서 몇 걸음 더 가면 서우봉 정상이다. 지금까지 서우봉이 가로막고 있던 동쪽 해안 풍경이 펼쳐진다. 서우봉 아래 북촌과 그 너머 동쪽으로 시야가 끝없이 달려간다. 이곳에선 제주도 동쪽 바다의 새벽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서우봉엔 충분히 정비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80대의 노부부가 편안히 걸을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새벽엔 일출을 보기 위해 오르고, 저녁 무렵엔 석양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서우봉은 함덕 주민 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편안하고 친근한 오름이다.

서우봉은 북쪽을 바라보며 솟아올라 서쪽의 함덕 해변을 잔잔하게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북촌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다. 새벽에 오르는 이는 일출을 감상하고 저녁에 오른 사람들은 석양을 바라보며 감동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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