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떠난 자리

여자들의 자리가 자꾸만 위협 받는다.

기사승인 2020-02-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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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여자들의 자리가 자꾸만 위협 받는다.

지난해 호평 속에 종영한 Mnet ‘퀸덤’ 제작진이 보이그룹 버전의 ‘킹덤’을 제작한다는 보도가 13일 나왔다. Mnet 측은 “출연자가 걸그룹이 될지 보이그룹이 될 지는 결정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온라인 여론은 ‘킹덤’ 제작을 확실시하는 분위기다. ‘킹덤’에 대한 기대가 높아서가 아니다. 모험을 할 땐 여성 출연자를 내세웠다가, 프로그램의 시장성을 확인하고 나면 남성 출연자를 데려다 앉히는 상황을, 이미 너무 많이 목격해와서다. 

Mnet은 알아야 한다. ‘퀸덤’은 프로그램의 형식이 새롭거나 탁월해서 흥행한 게 아니다. 긴 시간 ‘행사용’으로 제작된 걸그룹들이 실은 뛰어난 아티스트쉽을 갖추고 있었고, 단지 이것을 보여줄 기회가 부족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여섯 번의 경연 무대를 통해 명징하게 드러나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는 시청자와 출연자가 형성한 ‘유대의 벨트’는 ‘퀸덤’이 일궈낸 또 다른 성과다.

하긴. ‘방송국 놈들’이 알면 뭘 알겠나. Mnet은 ‘프로듀스101’ 시리즈를 만들 때도 여성 출연자들을 1번 타자로 등판시켰다. 일본 AKB48의 시스템을 모방했다는 외부의 지적부터 ‘악마의 편집’이나 ‘의리 테스트’ 같은 부당한 내규까지, 모두 여성 연습생을 통과한 뒤 희미해지거나 개선됐다. ‘길티 플레저’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Mnet의 명성을 위협하고 있는 TV조선은 지난해 ‘미스트롯’이 대성공을 거두자 올해 남자 버전인 ‘미스터트롯’을 제작했다. ‘미스트롯’의 우승상금은 3000만원이었는데, ‘미스터트롯’ 우승자에겐 1억원을 준단다. 부상으로 최고급 SUV 차량도 따라온다.

여자들이 떠난 자리때론 실험의 최전선에 남자들을 세운 프로그램도 나온다. JTBC의 ‘팬텀싱어’와 ‘슈퍼밴드’다. ‘팬텀싱어’는 크로스오버 그룹을 뽑는다는 점에서, ‘슈퍼밴드’는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던 밴드 연주자들을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의 자리가 여자들에게 넘어오는 일은 없다. 벌써 세 번째 시즌을 준비 중인 ‘팬텀싱어’는 그러나 단 한 번도 여자 버전을 내놓지 않았다. ‘슈퍼밴드’는 남자들로만 출연했던 시즌1이 끝나고 지난해 말부터 시즌2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디 이번엔 ‘여자도’ 출연하는 게 아니라 ‘여자만’ 출연하는 시즌이 만들어지길 고대한다.

뺏기게 될 운명일지라도, 여자들은 제 자리를 가져봤음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예능 프로그램 성비를 보면 그렇다. KBS는 가수 정준영의 성범죄로 ‘1박 2일’ 시즌4의 막을 내리고도 시즌5의 출연자 전원을 남자들로 꾸렸다. 매주 일요일 오후 5시 방송되는 MBC ‘끼리끼리’에는 연령과 직업이 각기 다른 10명이 출연하지만 이들은 모두 남자다. 코미디언 송은이가 방송국에서 자신을 불러주지 않아 팟캐스트로 건너간 게 벌써 5년 전이다. 그가 팟캐스트에서 발굴한 콘텐츠와 인물들이 누리꾼의 자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방송국에 수출되는 것을 보고도, 정말이지 방송국 놈들은 아무것도 배우지를 못한다.

그리고 KBS2 ‘거리의 만찬’이 있다. 여성 MC들을 하차시키고, 성차별적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남성을 그 자리에 앉히려던 프로그램. KBS가 시사평론가 김용민과 배우 신현준을 ‘거리의 만찬’ 시즌2 MC로 발탁했다고 발표하자 시청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KBS에 올라온 MC 교체 반대 청원에는 이틀간 1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제작발표회를 열어 김용민 발탁 이유를 설명하겠다던, 다시 말해 시청자의 의견을 ‘설득’하겠다던 KBS는, 그러나 김용민의 자진하차 의사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했다. “시청률 경쟁을 비롯한 대내외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저희 프로그램에도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이 제기”돼 개편을 준비했다고.

여자들이 떠난 자리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시사 프로그램을 독점해온 중년의 남성들과 성차별적인 구조 안에서도 짧게는 22년, 길게는 50년 가까이 경력을 지켜온 여성들 가운데, 더 ‘새로운’ 얼굴은 누구냐고. 시청률은 또 어떤가. ‘거리의 만찬’은 방영 당시 4% 안팎의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했고 5%를 넘긴 적도 많았다. 박미선과 신봉선을 하차시키고 그 자리를 모두 남성 출연자로 채웠던 KBS2 ‘해피투게더4’의 성적과 비슷하거나 높다. 

무엇보다 ‘거리의 만찬’의 기획 의도는 여성 MC들의 존재로 실현됐다. 비단 여성이 출연하거나 여성주의적인 주제를 다룰 때뿐만 아니라, 다문화 가정이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등 사회에서 지워진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소외와 배제를 경험해본 여성 MC들의 시선이 빛을 발했다. 심지어 ‘거리의 만찬’ 제작진들도 “중년 남성의 시선에서 제3자의 입으로만 떠드는 토크가 아니라, 이슈의 주인공이 말하는 시사”를 표방하지 않았던가. 

여자들의 자리는 너무 쉽게 위협받는다. 하지만 양희은은 말했다. “우리 여자 셋은 MC 자리에서 잘렸다. 그 후 좀 시끄럽다. 청원이 장난 아니다”라고. 장난 아니게 시끄러우면, 적어도, 자리를 빼앗으려는 손을 막을 수는 있다. 변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wild37@kukinews.com / 사진=Mnet, JTBC,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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