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맞서 변화 주도한 이들은 ‘평범한 여성들’

[n번방 연대기] 게이즈 닥스(gaze docs)의 한국 취재 후기-에필로그

기사승인 2020-07-27 03: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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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맞서 변화 주도한 이들은 ‘평범한 여성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집회를 촬영 중인 리론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반드시 유명한 활동가나 정치인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한국에서는 평범한 여성들이 사회를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해 한국에 다시 돌아올 계획이에요.”

디지털 성범죄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게이즈 닥스(gaze docs)팀. 이바(Ieva·라트비아)·올리비아(Olivia·영국)·리론(Liron·그리스) 등 3명의 팀원은 지난해 12월 한국에 입국, 6개월 동안 한국인 팀원 태이(가명)와 함께 1차 취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교수, 경찰, 사회운동가, 교육자 등 성범죄 근절에 앞장서는 다양한 전문가들이 게이즈 닥스의 카메라에 담겼다. 그러나 팀원들의 머릿속에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와 여성혐오를 조금씩 몰아내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촬영을 맡은 리론은 “한국의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 사회가 바뀌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을 취재하며 유튜브, SNS, 출판, 예술활동 등 다양한 경로로 진행 중인 페미니즘 운동을 접했다. 리론의 눈에 비친 한국 여성들은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친구들과 활발히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같은 개인의 적극성이 모여 큰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성범죄 피해 여성에 대한 시각도 바뀌었다. 리론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성범죄 피해자에게 씌워지는 전형적인 피해자상을 버리게 됐다. 사회적 통념에 따라 성범죄 피해자는 ‘도움이 필요한’, ‘안쓰러운’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리론이 만난 여성들은 결코 도움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범죄에 맞서고,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리론은 “편견과 부정적 피드백에도 좌절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하는 여성들의 용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성범죄 맞서 변화 주도한 이들은 ‘평범한 여성들’
페미니즘 예술가 인터뷰를 준비 중인 이바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모습은 이바에게도 명장면으로 꼽혔다. 이바는 한국에서 인터뷰한 여성들이 매번 다큐멘터리 제작 원동력을 충전해 줬다고 돌아봤다. 한국에 입국했을 당시 팀원들에게는 돈도, 마땅한 숙소도, 한국어 회화 능력도 없었다. 촬영 여정은 고됐지만, 인터뷰에 응해준 여성들의 진실성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이바는 ‘이 사람들과 더 오랫동안 교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바는 “코로나19로 인해 출·입국이 어렵지만, 2차 취재를 위해 어떻게든 팀원들과 다시 한국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바는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간접 체험하기도 했다. 그는 입국 초기, 숙소가 제공되는 영어 회화 학원에서 잠시 강사로 근무하면서 재미있는 사건을 겪었다. 학원 수강생들과 이바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한 20대 남성 수강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 영화는 거짓말투성이다”라며 분노했다. 영화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 수강생은 “한국 여자들은 꽤 잘 지내고 있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바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남성들이 여성혐오가 사회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꺼리는 것 같았다”며 “여성인권을 주제로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말했다.

성범죄 맞서 변화 주도한 이들은 ‘평범한 여성들’
페미니즘 인권운동가 리아를 인터뷰 중인 이바, 태이, 리론

유일한 한국인 팀원 태이에게는 모든 촬영 과정이 기적같았다. 코로나19가 국내에 확산하면서 취재 조건은 열악해졌다. 촬영을 계획했던 집회나 행사가 취소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러나 어렵게 섭외에 성공해 만난 사람들은 모두 게이즈 닥스의 촬영을 물심양면 도와주고 싶어 했다. 팀원들의 도전을 격려하는 한편, 완성될 다큐멘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많았다. 태이는 “코로나19 시국이 아니었다면, 더 다양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태이는 다큐멘터리 촬영 중 무력감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 집회를 촬영하면서다. 이날 강남역 10번 출구 벽면에는 ‘여성혐오 범죄 타임라인’을 정리한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이를 읽은 태이는 유사 범죄가 대책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집회 참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발표문을 낭독하는 모습은 태이의 용기를 북돋았다. 그는 "촬영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우리를 지지하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쿠키뉴스는 게이즈 닥스와 함께 1개월간 텀블벅에서 <한국 디지털 성범죄와 게임체인저 : Gaze Docs> 펀딩을 진행했습니다. 23일 펀딩 마감 결과, 당초 목표금액 550만원을 111% 초과달성한 615만8000원이 모금됐습니다. 후원금은 게이즈닥스의 디지털 성범죄 고발 다큐멘터리 ‘Molka’(가제)의 촬영·편집·번역 작업에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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