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가봤더니] 51살 엘리베이터의 조용한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기사승인 2020-09-29 05: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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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사진제공=낙원상가
[쿠키뉴스] 송병기 기자 =전 세계인의 눈과 귀가 서울을 주목했던 1988년 가을 10월 어느 날, 제24회 하계 서울 올림픽이 끝난 얼마 후 찾아갔던 낙원상가(정확히는 현재 이름으로 낙원악기상가다). 10대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몇 달치 용돈을 모아 어쿠스틱 기타와 작은 소형앰프를 사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당시 기자는 서울 중심가 종로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했던 때다.


1988년 가을, 낙원상가에 가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소개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고 해 찾았던 곳에서 만난 번쩍거리는 악기, 귀를 울리던 음악소리에 낙원상가에 대한 기억은 놀라움과 설렘으로 남아있다. “징징징 혹은 띵띵띵(당시 느꼈던 기타 소리에 대한 기억이다)” 작지만 웬만한 기능은 다하는 앰프에 잭을 연결해 줄을 팅겨본 뒤 돈을 내밀던 손의 설렘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낙원상가가 위치한 종로는 조조할인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았던 기억, 영화를 보고 들렸던 맥도날드, 그리고 종종 최루탄 가스 냄새로 눈물 콧물을 흘렸던 기억이 함께하는 곳이었다. “나도 기타를 갖고 싶다”는 10대 시절 설렘을 갖고 찾았던 당시에는 낙원상가도 그곳의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51년만에 교체되는 낙원 엘리베이터. 사진=박태현 기자


2020년 9월,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낙원상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2020년 9월의 어느 날이다. 이유는 1969년 낙원악기상가(이하 낙원상가)의 시작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리베이터 철거 소식 때문이다. 낙원상가는 1988년 10대 시절 기자에게 설렘을 주었듯이, 30년이 넘는 세월에도 종로구 낙원동(현재 도로명 주소는 삼일대로다)에 언제나 그 자신의 본분으로 자리를 지켜왔을 터다.

9월 어느 날 낙원상가 페이스북 ‘우리들의 낙원상가’에 올라온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엘리베이터의 철거 소식을 접하고 지난 21일 낙원상가를 찾았다.

“1969년 낙원악기상가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무려 51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낙원 엘리베이터’. 스위스 ‘쉰들러(SCHINDLER)’사의 제품으로 우리나라에서 가동되고 있는 엘리베이터 중 가장 오래된 엘리베이터로 확인이 되고 있는데요. 50년 역사를 담은 ‘낙원 엘리베이터’ 기계는 세월이 흐르면서 묵은 기름때와 벗겨진 페인트가 그간의 노고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하루에도 수 백 번, 수 천 번씩 사람들의 순간에 늘 함께한 ‘낙원 엘리베이터’. 낙원악기상가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낙원 엘리베이터’가 개정된 안전규정에 따라 9월 22일부터 순차적으로 교체를 시작합니다. 여러분들도 낙원에 방문하실 때 엘리베이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눠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들의 낙원상가 페이스북 글-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51년만에 교체되는 낙원 엘리베이터. 사진=박태현 기자
직원의 안내를 받아 51년간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조용한 은퇴를 앞둔 낙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 가장 왼쪽에 자리한 51살의 낙원 엘리베이터는 현재 사무실과 공유오피스가 자리한 5층까지만 운행된다. 성인 5~6명이 탈 수 있을 정도로 내부는 협소했지만 “51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도록 수많은 리모델링과 수리작업을 거쳤다”는 관계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낙원상가 관계자의 안내와 도움(코로나19 상황으로 방역수칙을 준수해야 했고, 안전을 위해 관계자 인솔이 필수였다)으로 낙원 엘리베이터 본 모습을 보기 위해 15층으로 향했다. 겉으로는 높은 건물이 아닐거라 여겼던 기자가 “낙원상가가 원래 15층 이었냐”라고 묻자 “1969년 상가와 아파트가 결합된 당시로는 가장 세련된 주상복합건물(이를 합쳐 낙원빌딩이라 부른다)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낙원빌딩 건물 꼭대기에서 한층 더 걸음을 옮겨 낙원 엘리베이터의 본 모습을 만났다. 덜컹 거리는 큰 기계음과 벨트, 와이어가 돌아가는 소리, 가끔씩 딱딱 거리는 쇳소리 속에서도 은퇴를 하루 앞둔 낙원 엘리베이터는 묵묵히 사람을 실어 날랐다.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낙원상가 기전실 장정규 주임. 사진=박태현 기자
낙원 엘리베이터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하1층 기계실을 찾아 28년 넘게 낙원상관 관리 업무를 맡아온 낙원상가 기전실 장정규 주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968년 준공 후 낙원빌딩은 당시 ‘맨션’이라고 불리며 고급아파트의 대명사였다”고 설명했다. 서울 시내 중심가 종로 한복판에 15층 높이로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고급 주상복합건물은 당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낙원 엘리베이터에는 각 층을 안내하는 승강기 안내원이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건물 안내를 맡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장정규 주임은 “1969년 당시부터 1990년대 초반, 약 1993년까지도 승강기 안내원이 있었다. 당시 승강기 안내원을 뽑는다고 하면 경쟁률이 굉장히 높아 사람들이 많이 지원했었다”며 “당시 낙원 엘리베이터는 현대식 엘리베이터로 명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지난 51년이라는 세월의 무게에 명물이었던 낙원 엘리베이터는 더 이상 사람들을 태우지 못한다. 물론 낙원빌딩에는 다른 현대식 엘리베이터들이 운행 중이다. 또가장 오래된 낙원 엘리베이터는 더 편하고 안전한 현대식 첨단 엘리베이터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낙원 엘리베이터는 지난 51년간 많은 이들의 설렘과 희망, 말못할 고단함과 눈물, 웃음과 울음을 갖고 이곳을 거쳐간 이들의 자리를 지켜오며 오르내림을 반복했을 것이다.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51년만에 교체되는 낙원 엘리베이터. 사진=박태현 기자


1969년 낙원악기상가, 그리고 ‘낙원삘딍’과 사람들

낙원상가는 1969년 낙원시장이 있던 자리에 삼일대로가 생기면서 상가(낙원악기상가)와 아파트가 결합된 국내 1세대 주상복합건물로 ‘낙원삘딍’으로 시작됐다. 상가 관계자들은 현재의 낙원악기상가(낙원상가)는 조선시대 이후 음악과 여흥을 생산하던 종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1970년대 쎄씨봉 등 통기타 열풍이 불면서 낙원상가는 ‘음악의 성지’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난 2013년에는 건물의 안정성과 역사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낙원상가는 꾸준한 관리(리모델링과 보수 공사)를 거쳐 현대식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 1층과 2층의 수많은 상점을 비롯해 2층 카페와 4층 야외공연장과 합주실, 녹음실, 전시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또 5층에는 공유 공간과 세미나와 워크숍 시설, 소규모 행사를 할 수 있는 시설들도 자기 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20년 가을에 찾은 낙원상가도 코로나19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상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다만 예전에 비해 들고 나는 사람의 수는 확연히 줄었다.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낙원상가 근영악기 김명수 대표. 사진=박태현 기자
낙원상가에서 관‧현악 수리 경력만 25년인 근영악기 김명수 대표는 낙원악기상가에 대해 “전 세계 모든 악기가 다 있다. 없는 악기가 없을 것”이라며 “국내 최고, 최대가 아니라 전 세계 최고, 최대 악기 상가”라고 소개했다. 

“정말 오랜만에 상가 내부에 들어와 봤다”는 기자의 말에 김 대표는 “세월이 흐른 만큼 고객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리모델링도 하고 시설도 최신으로 바꾸는 등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고, 또 상인들도 달라지고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낙원상가 직원으로, 상점 대표로 29년여를 일해 왔다는 김 대표에게도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 대표는 “언젠가는 좋아지지 않겠느냐”며 “힘냅시다. 상인들도 낙원상가를 찾는 손님들도 모두”라며 환하게 웃었다.
51살 엘리베이터의 은퇴, 그리고 낙원(樂園)상가
사진제공=낙원상가


지금 낙원상가는

낙원동과 안국역을 잇는 삼일대로가 지나는 낙원악기상가는 세계 최대의 악기 상점 집결지로 현재 300여개의 매장이 운영 중이다. 2층과 3층에 악기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고, 2층은 종합악기 매장으로 기타, 관‧현악기, 타악기, 드럼, 건반악기, 음향장비와 악기 액세서리를 판매한다. 3층은 전문악기매장으로 타악기와 음향‧미디어장비 매장이 들어섰다.

과거 악기를판매 위주로 운영됐던 낙원상가는 현재 악기판매와 함께 복합문화공간으로써 다양한 공연과 전시 등 문화활동도 펼치고 있다. 이와 관련 서울시가 운영하는 ‘낙원 생활문화지원센터’가 올해 1월 문을 열기도 했다. 낙원 생활문화지원센터는 동호회와 시민들의 음악창작 활동 지원, 생활문화 정보와 자원을 공유하는 지역 공동체 형성을 위한 커뮤니티공간이다.

낙원상가는 2016년부터 ‘반려악기 캠페인’을 통해 상인들 중심의 나눔활동도 펼치고 있다. 상인들이 직접 강사로 나서고 있고, 시민들에게 기부 받은 악기를 상인들의 재능기부로 수리를 한 뒤 문화소외계층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악기나눔 캠페인-올키즈기프트’도 실시하고 있다.

*취재를 마치고 “낙원 엘리베이터는 교체 후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현재 낙원상가 상인들과 관리업체 측이 박물관 전시 등 보다 의미있고 좋은 곳에 사용될 수 있도록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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