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을 지나 삼나무 숲 깊은 곳에 있는 부도밭을 찾아가면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율사비를 만난다. 한때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모각한 비석을 세워둔 적이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원래의 비석이 다시 와 있다.
부도밭을 나오면 소리 없이 조용히 흐르는 도솔천을 다시 만나는데 특히 수면에 비치는 나무의 모습이 아름답다. 단풍이 최고조에 이르면 이 장면을 사진에 담기 위해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 개천의 물은 맑지 않고 검은 듯 부옇게 보인다. 오염된 물은 아니고 선운산에 많은 도토리의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물에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는 문 처마에 걸린 현판 글씨 ‘天王門 (천왕문)’이 특별하게 보인다. 평생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았지만, 조선 최고의 글씨를 썼다고 평가되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그러나 한 세대 뒤에 추사 김정희는 그의 글씨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무시무시한 사천왕상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섬뜩하기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릎 아래에서 쩔쩔매는 양반이 보이고 심술궂은 표정의 노파도 있다. 사람들은 못된 양반과 뺑덕어미가 벌 받는 중이라고 말한다. 고개를 들면 마당 가운데 커다란 건물이 가로막고 있다.
이 만세루에 가려 대웅전과 그 뒤의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보이지 않는다.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보호받고 있는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이며 미당 서정주가 노래한 그 동백이다. 평균 높이 6 미터의 동백나무가 약 30여 미터 넓이의 띠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통상 3월 하순 꽃이 핀다. 강진 다산초당 너머 만덕산 백련사 근처의 동백나무 숲과 견줄만하다.
선운사 마당을 벗어나 나오면 실개천을 따라 계곡 끝의 도솔암까지 약 2.5km를 걷는다. 이 길을 실개천 오른쪽으로 간혹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가 있고 왼쪽으로는 오솔길이 마련되어 있다. 어느 길이든 머리 위로 나무가 울창해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차도는 간혹 차라도 지나게 되면 먼지가 성가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오솔길이 걷기 좋다.
길은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니 몸도 마음도 그저 편안하다. 잠시 세상의 일 잊기에 이만한 곳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마주친 다람쥐가 잠시 놀라 얼어버렸다. 가만히 마주 보다 쏜살처럼 내달린다. 그 뒤를 따르던 눈길을 거두고 가던 길에서 늘씬한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장사송이라는 소나무다. 이 소나무는 아래쪽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져 우산 모양으로 자라는 반송으로 구분되지만 특이하게 나무 높이 3m 정도에서 가지가 여럿으로 갈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아래쪽에서 갈라졌던 가지가 다시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사송의 나이는 600살, 높이 23m, 가슴 높이의 나무 둘레가 약 3 m 정도이다. 나무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이 장사현이어서 장사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장사송 인근에 진흥굴이라는 깊지 않은 동굴이 있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왕비와 공주를 데리고 이곳에 와 이 굴에서 수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암자를 짓고 왕비의 별호인 ‘도솔’을 따 암자 이름을 도솔암으로 정했다고 한다.
도솔암에 가면 암벽에 커다란 마애불이 세월을 견디고 있다. 마애불은 높이 15.7m, 무릎 부분의 넓이가 8.5m인데 마애불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말기,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조성시기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며 백제 위덕왕 때의 검단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특히 이 마애불의 가슴 아래에 새겨진 복장에 비밀스러운 기록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 비밀의 기록이 알려지는 날 조선이 망한다는 것이다. 1700년대 중반 전라감사 이서구가 이 기록을 꺼내는 도중 천둥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꺼내지는 못하고 ‘이서구가 꺼내본다’는 내용만 읽었는데 100여년 후 동학접주 손화중이 이를 꺼내 가져갔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움트던 시절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간절함이 담긴 이야기다.
선운사에서 2.5 km 걸어 올라온 도솔암 인근의 산세는 능선의 바위 때문에 매우 험준하게 보인다. 마애불 맞은 편의 가파른 철제계단을 오르면 해발 284m에 불과한 천마봉의 너른 바위 위에 서게 되는데 선운사가 골짜기 아래 아득하고 거대했던 마애불마저 손톱만 하게 보인다. 끝처럼 보였던 능선 너머로 산줄기가 겹겹이 모란꽃잎처럼 겹쳐지고 그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세상이 이어지고 있다. 선운산은 커다란 꽃이다. 피어나고 있는 모란을 닮았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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