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 하면 터지는 체육계 악습, 정말 바꿀 수 없나요

김찬홍 / 기사승인 : 2021-02-24 06:00:14
- + 인쇄

사진=연합뉴스 그래픽
[쿠키뉴스] 김찬홍 기자 = “운동할 때는 폭행이 당연한 줄 알았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깐 아니더라고요. 체육계를 벗어나니 다른 세상이 있었어요. 그제서야 ‘내가 살던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었구나’라고 느꼈죠.”

11살에 운동을 시작해 10년 가까이 운동선수로 지내온 A(28)씨는 최근 학교 폭력 사태를 두고 “이제서야 터진 것이 신기하다”라고 말했다. A씨 역시 운동선수 시절 선배들의 폭행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왔고, 후배들을 다스리는데 폭행을 사용해왔다. A씨는 ‘후회스럽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2월초 프로배구에서 시작된 ‘학교 폭력 미투’ 사태가 체육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태를 촉발했던 이재영·이다영(이상 흥국생명) 쌍둥이 자매를 시작으로 프로야구, 농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다수의 선수들이 학교 폭력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다. 현직 코칭스태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로배구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이 12년 전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박철우(36·한국전력)를 폭행한 사실이 재조명받으며 이 감독이 잔여시즌 출장을 자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체육계에서 폭력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

2019년 국가대표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의 성폭행 사건이 체육계를 강타한 뒤 국가인권위원회가 6만여명의 초·중·고등학교 현역 선수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학생 선수가 일반 학생보다 두 배 더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전체 응답자의 14.7%(8440명)가 코치나 선배로부터 신체 폭력을 경험했으며, 폭언이나 욕설·협박 등 언어 폭력도 15.7%(9035명)를 차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밖에 폭력을 경험한 초등학교 학생 선수의 38.7%(898명)는 신체 폭력을 경험한 뒤 감정을 묻는 말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함”이라고 답을 하는 등 폭력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9년 이상렬 코치(현 KB손보 감독)에 구타 피해를 폭로했던 배구선수 박철우. 사진=연합뉴스
◇ 체육계 학교폭력의 온상이 된 ‘성적 지상주의’

그동안 한국 체육계는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성적 지상주의’에 깊게 물들어 있었다. 성적만 내면 무엇이든 용서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지도자는 물론 선수도 좋은 학교나 좋은 팀으로 가기 위해서는 좋은 성적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문제가 소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폭력을 사용해 왔다.

A씨 역시 과거를 잊지 못한다. 중요한 경기에서 예상치 못한 출전을 하게 된 A씨는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터라 패배의 원흉이 됐다. A씨가 속한 학교는 대회에서 탈락했다.

A씨는 “당시에 죽고 싶었다. 엄청 맞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삿대질을 하는 느낌”이라며 “어떤 한 선배는 ‘너 때문에 실적이 안 생겨서 진학하기 어렵다’라며 꾸짖기도 했다. 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정말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외신들이 이번 학폭 논란에 대해 유독 크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도 한국의 ‘성적 지상주의’ 때문이다. 

최고의 선수를 육성하기 위한 엘리트 체육 구조인 한국과 달리 해외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언제든지 체육을 즐기고, 이를 통해 ‘경쟁’과 ‘성장’을 배워나가는 클럽 시스템을 추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적에 목을 매는 엘리트 체육이 아닌 클럽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도입해야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최태웅 프로배구 현대캐피탈 감독은 “(악습) 근절을 위해선 다 바뀌어야 한다. 합숙 문화가 클럽 위주로 전환되는 것도 근절을 위한 노력 중 한 가지가 될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박미희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감독이 16일 경기를 앞두고 학교 폭력 전력으로 중징계를 받은 팀 소속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 같은 공간서 먹고 자고… 탈출구 없는 '합숙 문화' 

합숙 문화도 체육계 악습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폭력과 체벌, 성추행 등 인권 유린은 대부분 숙소 현장에서 이뤄지거나 시작됐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운동선수들의 합숙 생활은 장단점이 극명하게 나뉜다.

선수들이 함께 생활 하다보니 경기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고 선수단의 결속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폐쇄적인 공간이라 온갖 악폐습도 발생하기 쉽다. 인권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합숙 경험이 있는 선수가 그렇지 않는 선수에 비해 피해 사실이 10% 가까이 높았다.

합숙 문화를 경험한 A씨는 “숙소 생활이 정말 지옥 같았다. 운동 시간에도 선배들의 눈치를 봐왔는데, 숙소로 들어가도 여전히 선배들이 있다. 선배들의 심부름은 기본이었다. 거의 하인이나 다름 없었다”라며 “학교와 집이 멀다보니 숙소 생활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집 근처에는 체육부가 없었고, 체육부가 있는 다른 학교를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지도자들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선수들의 사생활 침해 등의 문제가 있어 적극 개입은 쉽지 않은 현실이다. 특히 지도자와 선수의 성별이 다른 경우는 더 어렵다. 예방은 물론, 개선책 마련이 쉽지 않은 이유다. 

체육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하고자 출범했던 스포츠혁신위원회는 악습의 원인을 선수들의 합숙 훈련으로 파악하고 합숙 폐지를 체육계에 권고한 바 있다. 현재는 중·고교 운동부에서 합숙 훈련을 점차 줄여나가는 상황이다.


◇ 제도 개선만으로는 부족, 구성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제도 개선만으로는 체육계의 악습을 근절하기는 어렵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조재범 사건에 이어 철인3종 故최숙현 선수의 비극 등이 연이어 발생하며 제정된 국민체육진흥법 및 시행령도 인권침해 조사 강화, 신고 피해자 보호 조치 강화 등 성인 가해자들의 폭력을 감시하는 데에 집중했을 뿐, 또래 집단의 일상적인 폭력을 막기 위한 장치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또한 대한체육회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학교 폭력을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라고 언급하거나, ‘맷값 폭행’의 당사자인 최철원 M&M 대표가 아이스하키협회장에 당선됐다가 뒤늦게 인준이 거부되는 등 폭력에 대한 윗선들의 인식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따른다. 

학생 선수들의 전반적인 인식 개선 역시 시급하다.

전국 초중고교 학생 선수들이 인권위에게 제출한 답변서에선 "코치님에게 맞는 이유는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맞는 것이기 때문에 맞는 건 상관없다", "운동하면서 맞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다" 등의 답변이 줄을 잇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과 더불어 구성원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또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 및 선수들에 대한 교육과 감시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정용철 서강대 스포츠심리학 교수는 “엘리트 선수가 좋지 않은 일을 해도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거나 성적이 좋으면 면죄부를 받는 문화가 만연하다”며 “정부가 엘리트 위주의 체육인 양성을 없애겠다고 해야 그나마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스포츠 학교 폭력 문제는 지난 50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번 일이 개인들의 문제, 처벌로 그치면 비슷한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성적 지상주의 위주의 엘리트 체육 문화가 이어지면 구성원들의 인권 문제는 차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나서서 체육계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kch0949@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