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기업···의로운 부자들

소화제 팔아 자금 대고 직접 독립운동 뛰어들고
代 잇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취약계층 후원 등

기사승인 2021-02-26 05: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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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윤은식 기자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속설에도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을 다한 기업인들이 있다. 102년 전 전국 동시에 일어난 '3·1 만세운동' 성공에는 민족자본가, 민족기업의 헌신이 밑거름 됐다. 

일제의 서슬퍼런 탄압으로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독립운동 기업은 몇 안 되지만 소화제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고도 100년 넘게 승승장구하는 기업들을 되새겨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서울 서소문동 순화동(현재의 덕수궁 롯데캐슬) 동화약품 옛 본사 건물 앞. 이곳에는 '서울 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연통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주고받고, 국내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동화약품은 1897년 창업 이후 '활명수'라는 소화제 단일 제품을 100년 이상 판매해 오고 있는 국내 유일의 기업이다. 사람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민족 독립을 이뤄낸 물이기도 했다. 활명수는 기네스북에 최고(最古) 브랜드로 기록돼있기도 하다.

동화약품 창업주인 은포 민강 선생은 활명수를 팔아 얻는 돈으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댔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를 이어주는 가교역할도 했다. 

민족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기업···의로운 부자들
동화약품 창립자이자 독립운동가 '은포 민강' 선생.(사진제공=동화약품)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은 한때 만주까지 사세를 확장하며 승승장구했으나 민강 선생의 독립운동으로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민강 선생은 1919년 31운동 이후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에 가입,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 시켜 임시정부에 합류시키려다 실패해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게 됐다. 일제의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31년 11월 별세했다.

동화약품은 이후 독립운동가였던 보당 윤창식 선생이 맡게 된다. 보당 선생은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한 인물이다. 보당의 아들인 제7대 사장 가송 윤광렬 회장도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 중대장으로 맹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 1919년 10월 창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경방)는 창업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 우리 민족 모두 경방의 주식 1주라도 가질 수 있게 '1인 1주 운동'을 펼쳐 창립했다. 민족기업 중 국내 상장기업 1호로 유명하기도 하다. 경방 창립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 일반공모주는 1만6210주인 것으로 알려진다.

인촌 선생은 철종의 사위이자 거물 친일파인 박영효에게 사장 자리를 내주었는데, 박영효를 이용해 총독부 내 세력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인촌 선생이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하기 위해 총독부에 설립허가를 냈으나, 설립허가가 지지부진이었다. 그간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 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조선 자본의 방식 회사가 설립되면 시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총독부의 공작 탓이었다. 

게다가 경방이 설립될 당시 일본의 미쓰이가 부산에 방직회사를 설립했는데, 민족자본의 경방이 설립되면 시장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해 총독부가 경방의 설립 승인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미쓰이 그룹은 미쓰비시 그룹, 스미토모 그룹과 함께 일본의 3대 재벌 그룹 중 하나다.

인촌 선생은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 제공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그때 참여한 인물들은 이승훈, 한용훈, 최남선, 최린 등이었다.

인촌 선생은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 송진우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독립군 무기구매와 훈련에 쓰일 자금 4만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 1만원은 황소 100마리를 살 수 있었던 큰돈이었다.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고 국민의 소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일한 박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준 유일한 인물이다. 1894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 미국으로 유학 간다. 미시간주립대를 졸업 후 그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해 많은 돈을 번다. 하지만 그는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는 민족을 구하고자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민족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기업···의로운 부자들
유일한 박사가 모범납세자 상을 받는 모습.(사진제공=유한양행)
유 박사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 말기인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뤄진 '한인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 일제 말기인 1945년 미군 전략정보처 'OSS(현재 CIA의 전신)'의 '냅코작전'(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유 박사는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민족경제발전에 쉼 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이와 함께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기금을 출연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썼다.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방위적인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매해 광복절에는 국가유공자를 위한 지원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후원도 펼치고 있다. 

특히 대를 잇는 사회 환원은 우리 사회의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유 박사는 1971년 타계하면서 전 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에 기부했다. 유일한 박사의 딸 유재라씨도 본인이 갖고 있던 주식 등 200억원대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유한양행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유한재단을 설립, '유재라봉사상'을 제정해 약사, 간호사, 교사, 사회복지 봉사자 각 분야의 여성에게 상을 수여 하고 있다.

eunsik80@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