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영화 ‘모리타니안’ ...9.11 테러 후 관타나모에선 무슨 일 벌어졌나

기사승인 2021-03-12 06: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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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영화 ‘모리타니안’ ...9.11 테러 후 관타나모에선 무슨 일 벌어졌나
영화 '모리타니안'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남자가 있다. 어떤 근거도 없이 납치돼 수용소에 6년 동안 수감됐다.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먼 타국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지만, 풀려날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영화 ‘모리타니안’(감독 케빈 맥도널드)은 모두가 꺼리는 한 남자의 변호를 맡게 된 인도주의 변호사 낸시(조디 포스터)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낸시는 동료 변호사를 통해 북서아프리카 모리타니 출신 슬라히(타하르 라힘)가 관타나모 수용소에 6년째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슬라히는 ‘9.11 테러’를 벌인 이들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기소도 없이 끌려와 조사를 받았고 결국 자백까지 했다. 해군 소속 검찰관 카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사형 구형을 목표로 사건을 파고든다. 정반대편에서 시작한 낸시와 카우치는 슬라히가 끝내 말 못하는 비밀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영화는 낸시와 카우치가 재판을 준비하는 현재 시점과 슬라히가 겪은 경험담을 보여주는 과거 시점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현재 시점 이야기는 사건을 둘러싼 비밀에 접근하는 법정물에 가깝다. 억울한 일을 겪은 시민인지, 진실을 감추는 범죄자인지 알 수 없는 슬라히가 미스터리한 피고인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함께 준비하는 동료 변호사 테리(쉐일린 우들리)에게 사람을 보지 말고 냉정히 사건만 보자고 말하는 낸시도 감정적으로 휘둘리고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과거 시점 이야기는 훨씬 어둡고 답답하다. 낸시가 사건을 파고드는 속도에 맞춰 하나씩 공개되는 슬라히의 기억들은 생생하고 아프게 관객들의 가슴에 닿는다.

[쿡리뷰]영화 ‘모리타니안’ ...9.11 테러 후 관타나모에선 무슨 일 벌어졌나
영화 '모리타니안' 스틸컷

‘9.11 테러’의 그림자가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있다. 미국인으로서 느끼는 분노가 사회 전반에 당연한 감정으로 다뤄진다. 이슬람교를 믿는 다른 인종을 쉽게 판단하고 벌하려는 태도도 느껴진다. 낸시와 카우치도 이 같은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감정을 뒤로 밀어두고 사건에 집중하는 이들의 모습은 법과 인권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 상기시킨다. 국가는 무엇이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정치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에는 악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리타니 공화국 사람’을 뜻하는 제목 ‘모리타니안’은 슬라히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숫자로 불리면서도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으려하는 슬라히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모리타니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슬라히는 약자가 돼 고통 받는다. 그가 분노를 용서로 바꾸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모호한 영화다. 보통 할리우드 영화라면 약자의 편에서 사건을 해결해가는 낸시가 주인공이겠지만, 제목이 가리키는 방향과 주제 의식의 열쇠는 슬라히가 쥐고 있다. 최근 열린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선 슬라히를 연기한 배우 타하르 라힘이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고, 낸시를 연기한 배우 조디 포스터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7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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