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자산어보’ 귀양 간 조선시대 이단아의 현지 적응법

기사승인 2021-03-24 06: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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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 ‘자산어보’ 귀양 간 조선시대 이단아의 현지 적응법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바닷가에 쪼그려 앉아있던 죄인이 묻는다. 이 생물이 무엇이냐고. 어부가 그건 알아서 뭐하냐고 되묻는다. 이번엔 ‘대학’을 해석하던 어부가 거꾸로 묻는다. 이 구절의 의미가 뭐냐고. 죄인은 말한다. 내가 글을 알려줄 테니, 넌 바다생물을 알려달라고.

‘자산어보’는 천주교를 믿은 죄로 흑산도까지 귀양 간 정약용(류승룡)의 형 정약전(설경구)이 섬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반역죄를 뒤집어쓴 흉악한 죄인이지만 섬사람들은 그저 손님을 맞듯 그를 대한다.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책을 집필하던 약전은 한양에선 맛보지 못한 바다생물의 매력에 호기심을 갖는다. 글공부에 뜻이 있지만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창대(변요한)는 잘못하면 천주교에 물들까 싶어 약전을 멀리한다. 바다생물에 해박한 창대를 본 약전은 그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바다생물 도감인 ‘자산어보’를 집필하기 위해서다.

‘자산어보’는 조선시대 배경인 기존 사극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이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돕는 내용이다. 마치 현대에서 과거로 타임슬립을 한 것처럼 정약전을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그날이 오리라 믿는 인물로 그렸다. 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향한 분노, 왕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고초를 겪는 신하 등 영화는 역사 속 인물을 중심으로 그동안 반복된 익숙한 서사를 모두 거부한다. ‘자산어보’가 걷는 신선한 진로는 어떤 사극보다 지금 이야기 같고 공감된다.

[쿡리뷰] ‘자산어보’ 귀양 간 조선시대 이단아의 현지 적응법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역사에 절반만 빚을 진 영화다. ‘자산어보’의 서문에 나오는 정약전과 창대의 짧은 일화가 바탕이 됐지만 대부분은 상상으로 창작된 내용이다. 영화는 역사를 생생하게 재연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겨진 실제 역사는 가볍고 단순하게 다루고, 상상으로 만든 본 이야기에 집중한다. 색을 없애고 흑백만 남긴 영상도 역사와 거리를 두고 인물에 몰입하게 하는 느낌이다. 등장인물에게 큰 의미를 가진 순간에만 잠깐씩 색이 입혀진다.

거대한 사건과 갈등보다 사람들이 보내는 나날들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는 해당 시점의 연도와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사람과 가까이 붙어 이들이 보내는 일상의 시간을 담아냈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개인마다 다르다. 어떤 순간은 영원하게 기억에 남아있고, 어떤 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간다. 가치관의 차이를 드러내는 대목에선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근대의 물결이 느껴진다. 역사의 흐름은 지나치게 단단하고 분명하다. 그에 비해 개인은 유약하고 주어진 시간이 짧다. 약전과 창대의 삶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옳고 그름이나 서로간의 같고 다름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느껴진다.

흑백으로 된 사극이지만 현대 관객들이 공감할 장면이 많다. 지금과 비슷한 정서는 감동을, 다른 정서는 재미를 준다. 지금과 달리 임금을 향한 충성이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책을 쓰고 시를 짓는 행위는 실력을 증명하는 기준이다.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고 맛있는 음식이 중시되고 누구에게나 신분 상승 욕구가 있는 건 지금과 비슷하다. 이름도 없는 흑산도 주민 가거댁(이정은)이 여성이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이는 장면이 유난히 빛난다.

오는 31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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