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기사승인 2021-04-01 03: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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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사무실에서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잠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알록달록한 서울시장 보궐선거공보물이 눈에 들어와 뒤적거려봤다. 후보자 정보가 실린 면을 늘어놓자 재산이 0원인 후보자부터 72억원인 후보자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공보물 첫장의 A컷 사진 속 후보자들의 포즈는 기호 1번에서 15번으로 갈수록 과감해졌다. 형형색색의 공보물을 서로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시각장애인은 선거공보물을 어떻게 읽지?

인터넷에 ‘시각장애인 선거공보물’을 검색하자 예상치 못했던 문제점이 튀어나왔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형 선거공보물이 제공된다. 하지만 점자 선거공보물의 내용은 활자 선거공보물보다 부실하다. 공직선거법 제65조 2의 제1항은 활자형과 점자형 선거공보물의 면수를 모두 ▲대통령 선거 16면 이내 ▲국회의원 및 지자체장 선거 12면 이내 ▲지방의원 선거는 8면 이내로 제한한다. 점자는 활자보다 차지하는 면적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점자 선거공보물에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다. 

한 시각장애인은 공직선거법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점자 선거공보물의 매수를 일반형과 동일한 기준으로 제한하는 법률이 장애인의 참정권을 훼손한다는 것이 청구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점자 선거공보에 핵심 내용을 포함하도록 규정해 선거권 침해를 예방했고, 시각장애인이 선거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많으며, 국가가 과도한 비용을 부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기각 이유였다.

점자 선거공보물을 개선하려는 시각장애인의 투쟁은 10년째 진행 중이었다. 앞서 2012년 한 1급 시각장애인은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가 활자 선거공보물과 동일한 내용을 담은 점자 선거공보물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며 공직선거법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2014년 합헌을 결정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선거공보물 이외에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선거운동의 자유에 지나친 간섭이 될 수 있다는 이유가 제시됐다.

시각장애인들의 지난한 노력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 대선, 총선,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동안 단 한번도 시각장애인이 선거공보물을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얼마 전 안과 검진에서 녹내장 고위험군이라는 결과를 받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점자 선거공보물의 존재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심심해서 선거공보물을 뒤적거린 행동이 특권 향유였다는 생각이 비수처럼 머리에 꽂혔다.

안일한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나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불씨가 내게 옮겨붙을 위험을 감지하고서야 주변에 소화기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꼴이다. 점자 선거공보물을 검색하다 읽게된 시각장애인의 질문글이 뇌리에 남았다. 작성자는 선거철마다 집으로 배달되는 점자 선거공보물이 싫어서 장애 등록을 취소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누가 내 장애를 알게 될까 걱정돼서 심란하고 짜증이 난다’고 토로했다. 장애가 알려지면 심란하고 짜증이 나게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는 비장애인의 무관심이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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