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인형을 응원하나요? [기자수첩]

기사승인 2021-11-12 14:57:44
- + 인쇄
종이인형을 응원하나요? [기자수첩]
엘리베이터를 잡으려고 세 발자국 빨리 걸었는데 숨이 찼다. 운동을 하지 않고 움직임을 최소화한 생활을 지속한 탓이다. 예로부터 재부팅, 실오라기 등의 별명을 들어왔다. 체력이 바닥나면 기절하듯 잠들고, 근력이 형편없다는 의미다. 요즘에는 ‘종이인형’이라는 밈(meme)이 허약체질을 빗대는 말로 통용된다. 

인터넷 세상에서 종이인형은 환대받는다. 바람에 펄럭이는 듯한 모습이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허약한 몸으로 거친 세상을 무사히 살아내기를 바라는 응원도 이어진다. 어려운 신체활동에 도전하면, 성적이 형편없어도 열심히 하는 모습만으로 박수를 받는다. MBC ‘무한도전’에서 가냘픈 팔다리로 모든 게임에 최선을 다한 황광희는 호감 예능인으로 떠올랐다. 그의 종이인형 면모가 부각된 순간을 캡처한 이미지들이 널리 확산해 지금의 황광희를 있게 했다. 최근 tvN과 유튜브 채널십오야에 방영 중인 ‘운동천재 안재현’에서 휘청거리며 축구, 필라테스 등 운동을 체험하는 안재현도 호감을 얻었다. 회차마다 ‘수수깡’, ‘보행용 다리’ 등의 수식어를 적립하고 있다.

반면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종이인형 페이소스는 허구다. 인터넷 세상에서 쏟아지던 호의와 격려는 실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첫 직장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대학 졸업 전 인턴으로 근무했던 직장에서 위경련으로 기절을 했는데, 이후 대부분의 업무에서 배제됐다. 웃지 않으면 ‘또 어디 아프냐’, 밥을 남기면 ‘오늘도 상태가 불안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출장이 필요한 중요 업무에 따라나설 기회가 오면 ‘몸도 안 좋은데, 갈 수 있겠냐’는 만류가 들어왔다. 이런 말들이 100% 선의와 걱정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는 걸 파악할 정도의 눈치는 누구나 있다. 현실에서 종이인형들은 위장술에 능해야 했다. 정체를 들키는 순간 그의 커리어는 필패, 영원히 조직의 2군 벤치에 남겨질 확률이 높다. 인턴 근무는 씁쓸한 교훈만 남기고 종료됐다.

사회의 쓴맛을 보자 도처에 위장술의 대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취업 후 마주쳤던 한 종이인형은 만성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그는 업무시간 중 두통이 찾아오면 화장실에 숨어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희망사항은 ‘주말에 몰아서 아프기’다. 이전 직장에서는 민폐 구성원으로 지목돼 동료들에게 은근히 배척당했으며, 업무역량은 평가절하됐다.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미나 작가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에서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여성들은 예민하거나 아픈 상태로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며 스스로를 다그친다. 모든 종이인형들이 상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직장에서 ‘아픈 애’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다. 

종이인형이 못마땅한 데는 대단한 이유가 없다. 직관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조직에 아픈 애가 없는 게 이득처럼 보인다. 함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동료의 허약함을 감안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 성가시다. 조직에 자주 아프거나 지치기 쉬운 사람이 있다면, 그의 업무를 나머지 동료들이 떠맡는 상황도 빈번할 것이라는 귀납 추론이 이뤄진다. 비용효율을 좇는 기업들이 최종합격자에게 제공하는 채용 전 건강검진은 환영의 취업선물이 아니다. 모니터 속 종이인형은 마냥 웃기지만, 내 옆의 종이인형은 짐스럽다. 

직관적 계산기를 맹신하는 게 정말 이득일까? 종이인형을 배척하는 사람은 훌륭한 동료를 얻을 기회가 적다. 그는 여성, 환자, 장애인, 노인을 모두 배척하고 건강한 성인 남성만 남은 편협한 동료 풀(pool)을 갖게 된다. 패럴림픽 육상 선수들의 기록은 항상 올림픽 기록보다 빠르다. 장 도미니크 보비가 전신마비 상태로 집필한 <잠수종과 나비>는 20개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가 됐다. 건강한 몸에만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은 아니다. 정신력은 체력적 불리함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한계 없이 강화할 수 있다. 게다가 세상에는 건강한 몸을 가진 소시오패스도 매우 많다.

모두가 ‘아프면 쉬기’, ‘낙인찍지 않기’ 슬로건에 공감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뜻밖의 긍정적 변화를 일으켰다.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종이인형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가운 상황이다. 감염병이 사그라든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아플 때 쉬고, 낙인찍힐 걱정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모니터 밖 종이인형들을 응원한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