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제2대학 학장)

입력 2021-11-30 12:24:50
- + 인쇄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박한표 학장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중 일곱 번째 rule(규칙)인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살펴본다. 

우리 조상들은 허구적 이야기를 현실화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힘을 거래와 흥정이 가능한 영혼으로 의인화했다. 그리고 그 힘을 또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다. 이런 의인화는 큰 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미래가 과거의 행동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높은 곳에 앉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했다가 사후 심판의 날에 펼쳐 보이는 하나님도 이런 의인화와 다르지 않다. 이로써 미래가 바로 심판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적이면서도 생산적인 믿음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희생과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 있는 출발 지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충분하다. 희생과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의 두 질문에 답을 구해야 한다. 

(1) 지금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2) 그리고 나중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작고 단순한 문제 해결은 작은 희생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크고 복잡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려면 더 크고 가치 있는 희생이 필요하다. 더 큰 희생은 쉽지 않지만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미래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희생이 클수록 더 좋은 미래를 맞이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희생으로 미래가 더 나아진다'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1) 모든 희생 중에서 가장 크고 효과적인 희생, 즉 가장 이상적인 희생은 무엇일까?
(2) 가장 큰 희생을 바쳤을 때 미래는 얼마나 좋은 모습일까? 

우리는 즐거움을 뒤로 미룰 수 있고, 그것이 더 좋다는 걸 무척 어렵게 깨달았다. 만족 지연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동물적 본능과 반대되는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실 세계에서는 즉각적인 만족이 더 중요하다. 문명이 지연된 보상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안정된 상황에서만 만족 지연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사회 안정과 만족 지연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그게 공유(共有)이다. 그 공유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공짜로 주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는 행위가 아니다. 공유한다는 것은 교환과정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사를 가면 동네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다. 지나친 부탁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사회적 상호 작용을 맺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의 부탁을 받는 것은 이웃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좋은 기회이다. 그리고 채무 관계가 발생하므로 이웃 역시 나중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둘 사이의 친밀감과 신뢰가 쌓이게 된다. 이처럼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을 극복해 간다. 나는 멋진 삶은 관계와 활동의 양과 비례한다고 본다. 그래 관계를 시작하는 방식은 이렇게 이루어짐을 잘 알 필요가 있다. 교환하는 거다. 그 교환이 순환이 아닐까?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보다 뭔가를 가진 게 좋다. 그런데 갖고 있는 것보다 아낌없이 공유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이게 순환이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무엇보다 아낌 없이 공유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는 것이 가장 좋다. 공유하는 물건보다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더 오래가며 더 큰 신뢰를 얻고, 사람들이 접근한다. 이로써 나는 신뢰, 정직, 관용의 토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족 지연과 순환을 위한 교환은 종교적 의식과 희생이라는 은유적 이야기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늘에는 모든 것을 보고 우리를 심판하는 절대자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면 그분이 기뻐하실 것 같다. 우리가 그런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옥문이 열릴 테니까 그분을 기쁘게 해 줘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희생하고 공유하는 걸 습관화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릴 것이다." 피터슨은 이렇게 쓴 다음 다음과 같은 주를 달었다. "하늘에 실제로 그런 절대자가 있든 없든 간에 이 일은 모두 진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의 인격자라기 보다 우주의 원리, 즉 자연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라는 말을 좋아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어서, 성기기는 하나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늘이 모르는 죄가 있는 듯하지만, 벌 주기에 적당한 때를 선택할 뿐이다. 큰 물고기는 홀로 다니지만, 작은 물고기는 떼를 지어 다닌다. 작은 물고기는 서로 뭉쳐 돕지 않으면 큰 물고기한테 다 잡혀 먹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큰 물고기도 수명이 다해서 죽거나 그물에 걸려 잡힐 때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오늘도 비우고, 나누는 날로 채우고 싶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장자 식으로 말하면, 그게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나에게는 ‘변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가을의 감나무에서 그 시간을 만난다. 오늘 사진처럼.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