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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문화] 서울에서 경남 하동까지 내려가는 대절 관광버스 안에서 그는 4시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버스가 하동 인근에 도착, 50여명의 일행들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에 들어갔지만 그는 버스에 내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를 감상할 뿐, 식사를 사양했다. 그가 몽골에서 온 시인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몇몇 사람이 관심이 보였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그냥 지나쳐갔다.
일행들은 24∼25일 ㈔이병주기념사업회(공동대표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주최로 열린 ‘2009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이병주문학관이 있는 하동군 북천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행사 이틀째인 25일 그가 발제문인 ‘문학의 가을’을 저음의 목소리로 읽어나가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이 행사에 초대받은 진객임을 알려차렸다. 모두들 그를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못한/그 꽃”(고은의 ‘그 꽃’)이라는 시구에 나오는 ‘그 꽃’에 비유하며 계면쩍어 했다. 그는 몽골 최고의 시인이자 몽골 문화예술위원장인 바오 라와그수렝(61)이었다.
“저는 만일 세계문학을 자연의 사계절과 비교할 수 있다면 이미 가을이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의 기세는 스스로 여러 색깔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라앉아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황금빛의 그 무엇이 현재 세계문학의 중심적인 자리에 오를 기세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문학이 당도한 현 지점을 ‘문학의 가을’에 비유한 그는 “소설이 오늘날의 세계문학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 시문학에 대한 독자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사람들의 정신세계 내면을 차지하는 그 어떤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가 맹인이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어리석은 가정을 해봅시다. 그럼에도 그의 정신의 눈은 오늘날 우리들의 이러한 어리석음까지도 볼 수 있을 겁니다.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를, 나아가 우리의 미래까지도 보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통역자인 뭉크졸(28·경희대 국문과 박사과정)은 “몽골에서는 통상 시집 출간 때 2000부 정도를 찍는데 선생님은 1만5000부 이상을 찍는 베스트셀러”라며 “몽골 어디에서나 그의 이름을 대면 시를 암송할 만큼 사랑받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몽골 문학의 기원에 대해 묻자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몽골 문학의 기원은 파란 하늘을 찬양하는 표현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을 보며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입으로 표현한 그때부터 몽골의 문학이 탄생했다는 생각을 점점 확신하고 있지요. 이후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의 찬양은 산과 강물, 그리고 사람을 향하게 되고 결국 하늘의 광대한 시가 땅으로 내려와 우리들의, 또는 땅의 시가 되었을 겁니다.”
문학의 글로벌 시대를 가능케 하는 번역이라는 기능에 대해서 그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문학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읽혀지려면 무엇보다 번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번역을 통해 읽는 문학은 그 작품의 방향과 주제가 어떠하며 어떤 생각을 가진 작품이라는 입장의 소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민족의 문학은 그들의 언어로만 표현될 때 아름답습니다. 훌륭한 번역 역시 많이 있습니다만 그 훌륭한 번역의 기준을 누가 세울 수 있겠습니까. 결국 번역의 질이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는 기준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인간 정신 내면에는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시작되어 그치지 않고 흘러온 절대적 시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음식을 권했지만 그는 말없이 손을 가로저었다. 그는 행사 이틀 내내 하동읍내에서 사온 만두로 식사를 때웠다. 오랜 관습이라고 했다. 몽골식 음식인 만두 속에 그가 지향하는 민족 정신 같은 게 배어 있는 듯 했다. “유행이란 메아리에 불과해서 메아리가 차지하는 시대는 아주
짧을 수밖에 없지요. 살아가는 현실적 방법과 명예를 얻는 수단에 갇혀 있는 문학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한국 시인들에게 몽골의 하늘을 보러 오라고 권하고 싶어요. 몽골의 가을도 깊어가고 있지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