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소연 기자] # “현재 절판된 상황이지만, 우리 수업에는 이 교재가 꼭 필요합니다. 각자 알아서 구해오세요”
전공과목 오리엔테이션 시간, 대학생 A씨는 교수로부터 황당한 말을 들었다. 교수가 수업 교재로 지정한 책은 지난 학기 절판된 서적이었다. A씨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과 학내 서점으로 달려갔으나 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나마 한 권이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팔리고 있었지만, 가격은 정가의 두 배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불법 제본을 생각한 A씨. 그러나 학교 앞 인쇄업체들은 저작권 단속이 심해졌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 6일, 개강 2주차를 맞은 강의실에 교재를 구하지 못한 학생은 절반 이상이었다. 옆 사람의 교재를 곁눈질하며 수업을 듣던 A씨는 수강 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학 강의에서 절판된 서적을 교재로 지정해 학생들이 곤란을 겪고 있다. 출판업계 불황으로 교재가 절판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이러한 일은 지속될 전망이다.
◇ 교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부족한 장서·천정부지 중고가
강의 주교재가 절판된 상황에서 대학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교재 수급의 책임은 오롯이 학생의 몫이다.
대다수의 대학 도서관은 ‘지정도서제’를 운용하고 있으나 실효성이 없다. 지정도서제는 각 수업의 전공 교재 및 참고 도서를 도서관에 항시 비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80명이 듣는 대형 강의 과목의 지정도서는 한두 권뿐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절판된 교재를 빌린다 하더라도 학부생 대출 기간은 최장 30일에 불과하다. 네 달가량 진행되는 한 학기 수업에서 이용하기는 무리다. 결국 책을 구하지 못한 학생들은 시내 곳곳의 대형서점과 중고서점, 헌책방을 헤매며 발품을 팔게 된다.
이번 학기 절판된 전공 교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대학생 김모(24)씨는 “책을 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종로·신촌 등지의 서점을 온종일 돌았다”며 “앞으로 절판된 도서를 교재로 사용하는 수업은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절판된 전공 교재의 비싼 중고 가격도 문제다.
컴퓨터공학과 등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초보자를 위한 윈도우즈 게임 프로그래밍(프로그래밍)’의 경우, 현재 절판돼 중고 시장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다. 이 책의 정가는 2만5000원이다. 하지만 11일 기준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중고 가격은 5만원에 달한다. 철학과 전공 교재로 쓰이는 ‘심리철학’도 정가는 1만원이지만 중고가는 3만원이다.
대학생 문모(22)씨는 “절판된 프로그래밍 교재의 중고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 학생들의 불만이 높다”며 “별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현재 교재 없이 수업을 듣고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 저작권 단속·소량 이유로 제본 꺼리는 인쇄업체…“학생들 부탁에 우리도 난감”
과거와 다르게 캠퍼스 인근 인쇄업체들은 불법제본 요청에 쉽게 응하지 않고 있다.
지난 8일 서울시 내 대학가에 위치한 인쇄업체 12곳을 돌며 절판된 교재 2부의 제본을 문의했다. 이 중 7곳은 “절판된 교재라도 저작권이 남아있다면 제본이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10부 이하의 소량 제본은 인건비가 더 든다”며 거절한 업체도 있었다.
저작권법에 따라 저작물에 대한 권리는 저작권자 사후 70년까지 보장된다. 절판된 교재도 저작권이 남아있다면 책 내용의 10분의 1 이상을 복사할 수 없다. 이를 어기면 5년 이하의 징역과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된다.
한 인쇄업체 관계자는 “학기 초에 절판된 도서라며 제본을 부탁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며 “출판사와 저자의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없어 난감하다”고 설명했다.
◇ 출판업계 “책 찍어내도 창고 보관비용 못 얻어…대학교재 출판사 사라질 위기”
교재 절판에 학생들이 곤란을 호소하고 있지만, 출판업계는 “재출간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대학교재는 전문서적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수요가 많지 않다. 출판업계에 따르면 불법제본, 중고매매 등으로 인해 전문서적 실구매자는 수요자 수보다 훨씬 적다. 책을 출간해도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대다수 출판업계는 해마다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에 따르면 21개 주요 단행본 출판사의 2015년 매출액은 전년보다 14.9% 감소했다. 대표적인 대학교재 전문 출판사인 박영사의 2015년 영업 이익은 전년 대비 37%나 줄었다.
익명을 요구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100명이 듣는 전공 수업에서 교재를 사는 학생은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며 “인문·사회 전공 서적은 1년에 10권 팔기도 어렵다. 제작한 책을 창고에 보관하는 비용이 더 드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대학교재 및 학술도서를 전문으로 출판하는 다산출판사의 강희일 대표도 “한 출판사에서 1년에 5~10권의 전문서적을 절판하고 있다”며 “전문서적 출판업계의 적자가 지속된다면 한국에서 대학교재를 제작하는 출판사는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피해는 결국 학생 몫…“최소한 공부할 수 있는 여건 마련해줘야”
전문가들은 최종적인 피해는 교재를 수급하지 못한 학생들이 지게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교재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PPT 등 보조 자료에만 의존해 수업을 듣게 된다면, 교육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성적 등 학생에 대한 평가와도 연계될 여지가 있다.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조문흠 교수는 “교재를 중심으로 수업하는 이론 강의에서 주교재가 없다면 학생들의 불편이 초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교육연구소의 김삼호 연구원은 “강의 교재의 수급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교육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라며 “학교와 담당 교수, 출판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애초에 담당 교수가 수업을 설계할 때, 학생들이 구하기 어려운 책을 주요 교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교수가 학생에게 구할 수 없는 책을 구하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갑질’”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