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거듭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힘을 쏟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자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 성폭력은 개인의 조심만으론 예방할 수 없다. 핵심은 문화다. 문화가 바뀌어야만 여성들의 삶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디지털 성범죄란 괴물과 싸우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그러나 당장의 내일을 답보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부족한 예산과 열악한 여건 역시 이들이 극복해야할 높은 허들이다._편집자 주
◇ 우릴 힘들게 하는 것들
서랑 활동가는 당장 ‘내일’이 걱정이다. 올해 후반기와 내년 한사성이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예산이 마련될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예산 확보가 안 되면 한사성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현재 한사성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동료들이 너무 힘들어할까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사이버 성폭력 근절을 위한 여러 사업, 피해지원, 법제화 활동, 그리고 기자회견 등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최소한의 활동 자금은 여러 사회운동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일 터. 서랑 활동가는 이것이 불안정한 현재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
효린 활동가의 일상은 격무의 연장선상이다. 산처럼 쌓여있는 업무를 해내도 일은 점점 더 늘어났다. 주말을 온전히 휴식에 할애하려다가도 그 시간에 다른 동료가 일을 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에게는 ‘안심하고 쉴 수 있는’ 휴가가 절실하다.
리아 활동가는 ‘먹고사니즘’으로 고민이 많다. 돈이 없다. 망고를 잔뜩 사먹고 싶고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의 거처를 구하고도 싶다. 현재로선 해결이 요원한 일들이다. 그는 조만간 대출상담을 받으러 은행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승진 활동가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스스로 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이후에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고군분투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사성 활동에 개인적인 성찰이 더해져 힘이 든다”고 말했다.
여파 활동가는 “과거에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세상 변한다”며 “세상이 저절로 변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이제 당신과 나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 ‘평범한 삶’은 안녕…
서랑 활동가는 스스로 평범한 삶의 궤적에서 많이 비껴나 있다고 여긴다. 한사성 초반과는 달리 현재는 그의 선택에 더 이상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여성인권 활동가로서 더 이상 평범한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여성폭력과 관련된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여파 활동가는 과거의 자실을 ‘컨베이어벨트 위를 열심히 달리던 사람’이었다고 표현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속도’가 전부였다. “어디로 달릴지 선택하고 싶어 항상 그 컨베이어벨트를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고 했다. 한사성이 그에게 ‘속도’보다 ‘방향’을 결정할 용기가 됐다. 비록 한사성을 선택한 이후 경제적 곤궁 등의 어려움이 밀려왔지만,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여파 활동가는 스스로 선택한 방향으로 어떻게 더 잘 달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리아 활동가는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선택했더라도 오래 버티진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한사성 활동가로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설명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이 여느 평범한 이들보다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최근 동창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그는 장광설을 늘어놓아야 하는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효린 활동가는 최근 아르바이트 경험을 들려줬다. 피곤함은 비단 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농담처럼 주고받는 대화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다. 알바에서조차 여성혐오나 성차별적 대우는 일상이었다. 그는 새삼 이질감을 느꼈다. 그에게 한사성은 수평적이고 안전한 조직이다. 효린 활동가는 지금이야말로 그가 지향하는 삶이라고 했다.
◇ 최저임금을 받고 싶다
한사성 활동가들의 월급은 70만 원 가량이다. 현재 한사성의 재정 상황으로는 언감생심 최저시급은 꿈도 꿀 수 없다. 서랑 활동가는 최소한의 지출로 살아가는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이러한 ‘미니멀 라이프’로 은행 잔고가 매우 적은 돈이나마 남는다고 했다. 지금의 ‘저축’ 속도로 집을 사기 위해선 “인생을 다섯 번은 살아내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월급 70만원에서 학자금 대출 상환, 식비, 통신료, 교통비를 제하면 여파 활동가의 손에 쥐는 돈은 거의 없다. 그는 빠듯하게 산다.
리아 활동가는 투잡을 뛰어 생계비용을 충당하곤 했다. 한사성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현재 그는 종종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의 소박한 바람은 식비 등 생존을 최소한의 소비 외의 소비를 하는 것이다. 그를 포함해 한사성 활동가 중 일부는 헌옷박스에서 옷을 리폼해 입기도 한다. 본의 아닌 ‘빈티지 패션’을 구사해야하는 웃픈 현실이다.
효린 활동가는 월급 일부는 빚을 갚거나 생활비로 쓴다. 자취방의 월세와 공과금은 그의 벌이를 잘 아는 동거인이 대신 내고 있다.
◇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운영자금, 사무실 보증금, 후원자 확보 등은 우선순위를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요긴한 것들이다. 서랑 활동가는 “지금의 활동을 이어나가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반 자원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여파 활동가는 활동가들의 인건비가 시급하다고 했다. 각종 공공사업을 진행해도 한정된 사업예산 중 인건비는 없거나 매우 적은 액수에 불과하다. 당장 내년 7월 지금의 사무실도 비워줘야 하는 상황. 지금의 사무실을 나가면 당자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정부 등 지원에 의지하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시민들의 후원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리아 활동가도 운영자금과 사무실 보증금이 현재 가장 필요하다고 했다. 사무실 보증금을 마련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운영자금도 별로 없어서 당장 이번 달 활동비를 받을 수 있을지 그는 마음을 졸인다.
효린 활동가도 사무실 마련이 걱정이다. 그는 “사무실 계약이 종료되면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며 “피해상담을 위한 별도 공간도 확보된 사무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한 한사성 구성원들의 최저임금이라도 받길 바랐다. 휴식을 취할 시간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알바 등 추가 노동을 하며 고단하게 활동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에필로그…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우리가 여성인권 활동가로써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때가 있어요. 다만, 안정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다는 바람뿐입니다. 동료들이 활동을 하다가 조금 아파도, 부모님이 아프셔도, 공부를 하다가 돌아오고 싶어도, 집이 너무 멀어서 자취를 하고 싶어도 이 활동을 계속 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 힘차게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서랑 활동가)
“활동가들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싸움의 한복판에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는 겁니다. 여러분 한 명 한 명의 행동이 가장 소중합니다.” (여파 활동가)
피해지원 실무자로서 피해당사자의 고통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지, 이 과정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경험으로 소화하고 회복하는 모든 과정엔 수많은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피해자가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지지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효린 활동가)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