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④ “내가 죽더라도 알려야 한다”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사승인 2017-08-09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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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 일본 교토= 정진용, 이소연 기자] 지난해 8월, 일본 교토(京都)시 산골짜기에 강제동원노동자상(노동자상)이 최초로 세워졌다. 건립 과정은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주도했다. 일단 노동자상을 일본 땅에 들여오는 것부터 문제였다. 당시 한일관계는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이전 문제로 경색국면을 맞았다. 양대 노총은 모든 과정을 극비에 부쳤다. 소녀상을 제작했던 김서경·김운성 부부가 이번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노동자상과 추도 비문은 각각 다른 날짜에 옮겨졌다. 비문에는 "눈 감아야 보이는 조국의 하늘과 어머니의 미소, 그 환한 빛을 끝내 움켜쥐지 못한 굳은 살 밴 검은 두 손에 잊지 않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는 내용이 담겼다. 예술 작품처럼 보이기 위해 노동자상 위에는 흰 천을 덮었다. 그렇게 세관 통과 과정을 무사히 넘겼다.

문제는 제막식 당일 일어났다. 지난해 8월24일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의 일본 입국이 거절된 것이다. 최 직무대행은 오사카(大阪府) 간사이 공항에서 4시간가량 입국 심사를 받았으나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년 이상 실형 전력이 있는 경우 입국을 불허할 수 있다'는 출입국 관리규정이 근거였다. 최 직무대행의 전력은 지난 94년 서울지하철 노조 차량지부장으로 활동하며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 전부다. 그는 "그동안 아무런 제재 없이 두 차례나 일본을 오갔다"며 그들의 결정을 납득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노동자상이 들어선 곳은 교토시 우쿄구(右京区) 게이호쿠초(京北町)에 위치한 '단바망간기념관(丹波 マンガン 記念館)'이다. 이곳은 개관 18주년을 맞은 일본 유일의 강제징용노동자 역사관이다. 재일동포 2세 고(故) 이정호(1932~1995) 전 관장이 개인 재산을 털어 세웠다. 아들 이용식(58) 관장이 뒤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이 관장은 우익 세력의 위협을 무릅쓰고 노동자상 건립에 기꺼이 부지를 제공했다. 이 관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노동자상은 일본 땅 위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5월24일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단바기념관에서 이 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에서는 강제동원 기록물에 대한 우익세력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상 설립을 망설이지는 않았나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예전부터 강제동원 상징 조형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딸은 노동자상 건립 소식이 우익단체에 알려질 것을 우려했다. 그렇지만 내 신상에 대한 걱정 때문에 소신을 바꿀 수는 없다. (노동자상 건립으로 혹시나) 죽는다고 하더라도 '강제동원 역사를 알려야 한다'는 내 신념을 지켜야했다. 키가 크고 삐쩍 마른 노동자상은 진폐증에 걸려 고생하던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그래서인지 동상을 보면 마음이 뭉클하다.

실제로 노동자상이 세워진 뒤 항의가 이어졌다. 지난 4월 넷우익(인터넷을 기반으로 국수주의 성향을 띄는 이용자) 한 명이 입장료도 안 내고 들어와 노동자상 사진을 찍고 인터넷에 올렸었다. 이후 '일본은 강제동원을 한 적이 없다'는 전화가 여러 번 왔었다. 그럴 때면 "강제동원 역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단바기념관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단바기념관을 세우기로 결정한 뒤 교토부와 게이호쿠초에 융자와 운영보조금을 요청했다. 과거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지자체는 지원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지자체 관계자가 "강제동원이나 진폐증에 관한 기념관을 지을 건가"라고 물어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동네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이유를 댔다. 한국 정부에는 도움을 요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이명박 정부 시절 국민포장으로 500만원을 받은 적이 있다. 재외동포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단바기념관이 아닌 '이용식 관장'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매해 적자가 500만엔(한화 약 5085만원) 수준이다. 지난 2009년 한차례 폐관 위기를 넘겼다. 현재는 양대 노총이 지난해 기부한 돈과 입장료로 운영하고 있다. 단바기념관을 유지·보수 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워낙 많다. 매해 도움이 없는 한, 입장료로만 단바기념관을 꾸려나가는 것은 무리다. 

한국의 경우 더욱 관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시민사회에서 일시적으로 도움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경우, 강제동원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부 차원에서 일본 역사 왜곡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④ “내가 죽더라도 알려야 한다”

-어려움 속에도 박물관을 운영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바기념관은 아버지의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 고 이 전 관장은 2살 때 일자리를 찾던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왔다. 16살 때부터 30여 년간 광산에서 일했다. 그러다 지난 1973년, 아버지가 돌연 피를 토했다. 처음에는 결핵인 줄 알았다. 진폐증(폐에 석탄가루가 쌓여 점차 굳어지는 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폐증을 노동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싸웠다. 그 과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알게 됐다.

'말이 모집이지 억지로 끌고 갔다'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조선 사람은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동포들의 증언이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조선인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념관 건립에 매진했다. 전 재산을 기념관 건립에 쏟아부었다. 가족은 아버지에게 "묘지 터를 살 돈은 남겨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본 땅에 무덤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나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느니 차라리 민족을 위해 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박물관이 유지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강제동원 역사를 남기는 일은 이웃 나라를 향해 '다시는 과거의 침략 행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과 같다. 동시에 '가해자였던 과거를 잊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행위다. 전쟁은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남기기 마련이다. 일각에서는 자신이 가해자였던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알리는 나라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일을 보라. 아직도 나치 수용소 등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시설이 보존돼 있다. 독일은 이런 노력으로 이웃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일본은 어떤가. 일본에서는 부끄럽고 어두운 역사를 말하면 '반일'(反日) 이라고 한다. 그럼 미국이 터트린 원자폭탄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립 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추도 평화 기념관'은 '반미'(反美)인가. 일본의 가해 역사를 남기는 일은 반일이 아니다. 평화를 위한 것이다. 

-한국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박물관이 계속 운영될 수 있게끔 지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경제적 여건만 뒷받침된다면 박물관을 깨끗이 정비하고, 한국의 박물관과 연계해서 특별 전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여전히 일본에는 재일동포를 향한 차별의 시선이 존재한다. 단바기념관을 지원하는 것은 이용식 개인에 대한 지원이 아니다. 강제동원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 일본 사회에서 외면받는 재일동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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