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위안부 배지 소녀, 왜 ‘일본 불매운동’ 걱정했나

기사승인 2019-07-10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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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매운동으로 일본에 피해를 입히겠다는 건, 사실 단편적인 것 같아요. 일본 아베도 이를 예상하고 일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사전에 계산기를 다 두드려 봤겠죠. 막무가내식으로 불매운동이 번진다면 오히려 그동안 쌓아왔던 한류 열풍이 일본에서 사그라들까 걱정이 됩니다.”

일본 불매운동 취재를 위해 신촌에서 한 고등학생을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가방에 달린 위안부 배지를 보고 말을 걸었으나, 전혀 예상외 답변이었다. 기자에게도 일본은 평소 좋은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기에 그의 ‘애국’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던 터였다. 엊그제부턴 평소 좋아하던 일본 맥주를 대신해 ‘카스 레드’를 집었다. 일본 현지 식재료를 구입해 사용한다고 홍보하는 이자카야, 라멘집은 안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아차’ 싶은 생각이 스쳤다. 과연 불매운동의 끝은 어디일까. 아사히, 토요타, 유니클로를 한국에서 퇴출하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일본 기업이고 어디까지가 한국 기업일까, 다이소, 세븐일레븐은 과연 일본 기업이 아닌걸까. 내가 은연중 쓰고 있는 일본 제품이 혹시 또 있는 건 아닐까. 

그의 말처럼, 아베는 이 같은 상황을 모두 예상하고 행동한건 아닐 런지, 항간에는 아베가 미국의 트럼프와 한국 수출 규제를 놓고 이야기를 마쳤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아도 손해 볼 게 없다는 아베의 판단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오히려 아베의 공작에 휘말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한국의 반일은 곧바로 일본 우익들의 먹이가 됐다. 

순수한 애국심이 막무가내식 일본 불매로 번져, 일본의 ‘한류 탄압’ 빌미로 이용되지 않을까도 우려스럽다. 한류라는 작업(?)은 무려 10년 넘게 진행되어 왔다. 지금 일본의 10대 20대는 한류 열풍을 보고 듣고 자라온 세대다. 사람의 인식을 지배하기란 참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이뤄 왔다. 배용준, 카라, 방탄소년단 등이 진짜 애국자라는 말도 돌았다. 

몇 해 전에는 한류에 빠진 일본인들이 ‘한국에 죄송합니다.’ 라는 문구를 들거나, 태극기를 몸에 그린 모습을 SNS에 인증했던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의 힘이 이렇게나 무섭다. 싸움, 큰 소리 한번 없이 우린 일본인의 인식 속으로 성공적으로 스며들어갔다. 아베가 촉발하고 있는 한일 갈등의 최종 목적이 일본 내 ‘한류 축출’ 인지도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기자수첩] 위안부 배지 소녀, 왜 ‘일본 불매운동’ 걱정했나물론 일각에서는 문화와 정치는 분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애국심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칼 같은 존재다. 너무나 순수해, 올곧은 곳에 집중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최근에는 일본 불매운동이 이슈가 되자, 국내에서 일본인 연예인을 퇴출하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애국’일까. 양국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면 일본 내에서도 이 같은 주장이 힘을 받을 가능성 역시 크다. 

물론 한류가 첫 번째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애국심’이란 일본인에게도 있는 감정이다. 

불매운동이 막무가내식으로 번져 ‘혐일’로 변질된다면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다. 일본 불매운동은 조용하고, 철처하게,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국내 토종 브랜드 역시 잠깐의 관심을 위해 애국심에만 기대선 안 된다. 제품의 질과 가격 등에 승부를 보는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이 먼저다. 복수심은 한시적 감정으로 10년 20년 장기화되기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정부 역시 감정적 반응은 금물이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해 일본 제재에 대한 불합리성을 국제 사회에 알려야 한다. 아울러 이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짓(?)은 결코 해선 안 된다. 이는 아베와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불매 운동’이 ‘퇴출 운동’으로, ‘반일’이 ‘혐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아베의 꾀임에 넘어간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필요한 순간이다. 

한전진 기자 ist1076@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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