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직장인 강씨(34세)는 올 여름 큰맘을 먹고 가족과 유럽여행을 결심했다. 희귀질환인 고셔병 진단 후 치료를 시작할 당시에는 2주에 한 번은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 치료일정 때문에 앞으로 평생 장기 해외여행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장기여행의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 먹는 약으로 관리할 수 있는 치료법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씨는 주치의 상담에서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해서 희망을 갖게 됐다고 했다.
생소한 병명은 물론, 진단이나 치료조차 쉽지 않았던 희귀·난치성 질환. 그런데 최근 희귀·난치성질환의 치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불치병’에서 ‘일상에서 관리하는 질환’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국내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들은 2016년 기준 약 1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병명과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은 질환이 많지만, 전체 희귀질환 중 5%는 치료제가 개발돼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제대로 진단받고 빠르게 치료를 시작할 경우, 완치는 어렵더라도 만성질환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앞서 강씨가 진단받은 고셔병도 치료제가 있는 희귀질환 중 하나다. 리소좀 축적질환에 속하는 고셔병은 체내에서 세포를 분해하는 효소(글루코세레브로시다아제)가 부족해 발생하는 유전 질환으로 간 및 비장 비대, 출혈 증상, 골격 이상 증상 등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고셔병은 1990년대 들어 주사 치료제가 등장, 환자들은 2주에 한 번 규칙적으로 병원에 방문해 정맥주사를 맞는 식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기서 더 발전해 먹는 약으로도 관리할 수 있는 치료법이 나왔다. 환자 상태에 따라 하루 1~2회 복용으로 2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장기 여행, 출장도 가능해진 것이다.
다발성경화증 역시 주사제만 존재하던 치료 시장에 ‘먹는 약’ 옵션이 새로 추가된 희귀·난치성 질환 중 하나다. 다발성경화증은 뇌, 척수 등의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진행성 탈수초성 질환으로 시력저하, 사지 마비, 인지장애 등 광범위한 신경계 증상을 동반하는 자가 면역질환이다.
다발경화증은 한 번 발병하면 계속 재발해 결국 장애가 남게 되는 문제가 있어 환자들의 고통이 상당히 큰 편이다. 또한, 평생 약물치료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기적으로 직접 자가 주사 치료를 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따랐다. 그런데 꾸준한 치료제 개발로 최근에는 주사 대신 ‘먹는 약’으로 대체할 수 있는 등 환자의 편의성과 선택의 폭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좋은 신약이 있지만 고가의 의료비로 인해 사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앞서 소개된 고셔병과 다발경화증의 치료제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환자들의 부담이 적다. 그런데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 효과적인 신약이 있더라도 환자들의 접근성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희귀난치질환인 다발골수종은 우리 몸에서 면역체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형질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분화 또는 증식되어 나타나는 혈액암이다. 특히 다발골수종은 재발률이 70~80%로 매우 높아 환자들은 병세가 좋아져도 다시 재발한다는 두려움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최근 의료현장에서는 다발골수종의 1차 치료 후 먹는 약으로 재발을 늦추는 ‘유지요법’이 주목받고 있지만, 보험급여 적용이 되지 않아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상황이다. 백민환 한국다발성골수종 환우회장은 “다발골수종 환자의 대부분이 재발을 경험할 정도로 재발률이 높고, 재발이 빠를수록 삶의 질이 떨어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다”며 “효과적인 치료에 환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급여 확대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처럼 환자의 편의성과 삶의 질을 따지는 의료현장의 요구는 앞으로 계속 높아질 전망이다. 충남대병원 희귀질환센터장 임한혁 교수는 “현재 희귀질환 치료 패러다임은 평생 치료를 계속해야 하는 환자들의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 치료 방법의 편의성을 더욱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치료제가 몇 안 되는 희귀질환 치료 시장에서 경구제는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임 교수는 “다만 희귀질환 치료는 치료 효과와 편의성을 갖춘 치료제의 개발과 더불어 정확하고 빠른 진단이 우선 뒷받침돼야 한다”며 “희귀질환에 대한 대중과 의료진의 이해가 높아져 더욱 빠르게 희귀질환 환자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더 많은 환자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