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 쫒아낸 병원, 매정한 의료노동자...국립암센터 파업이 남긴 것

의료현장 노동환경 개선 바람...정규직 전면 전환·임금 11% 인상 등 파격 결과도...파업 땐 환자 고통 심각

기사승인 2019-09-19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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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료현장에서 노동환경 개선 바람이 분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임금 10% 인상' 등 파격적인 노사협상 결과가 연일 잇따른다. 반면, 국립암센터 파업은 암환자는 물론 의료인과 보건의료노동자 등 의료현장 모든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병원 노동환경이 나아진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정작 치료받는 환자를 볼모로 삼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쿠키뉴스가 병원 노사 갈등의 현황과 환자들의 이야기를 짚어봤다.

병원은 파업 중"파업 병원 잘 나가네"

열악한 노동환경의 대표 사례로 언급되던 병원. 그런데 요즘 의료현장 곳곳에서 부당하거나 열악한 노동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국립대병원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대표적 화두다. 우선 서울대병원은 지난 3일 본원과 서울시 보라매병원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노동자 800여명을 직접 고용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당초 서울대병원은 자회사를 설립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노조의 거센 반발에 밀렸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의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난 2017년부터 꾸준히 천막농성, 단식투쟁, 무기한 총파업 등을 벌여온 결과다.  

강원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다른 국립대병원들은 난감한 상황이다. 국립대병원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 인건비 보전 없이 정규직 전환만 이야기하니 재정적인 부담이 크다”며 “직접 고용했을 때 처우 관련 문제가 또 유발하게 된다. 서울대병원도 급여나 복지 수준을 어떻게 적용할지 난제가 될 것으로 실무진들끼리는 전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하반기 사립병원들의 노사교섭에서는 노측에 기분좋은 소식이 많았다. 특히 을지대병원은 전 직원 임금 11% 인상, 임금체계개편, 육아휴직급여 도입 등 파격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건양대병원도 노조 임금 5% 인상, 근무제도 개선하기로 약속했다. 연세의료원은 기본급 3% 인상 및 격려금 60만원 지급 등 합의안을 통과시키며 마무리지었다. 

여전히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곳도 있다. 광주기독병원은 공무원 기본급 100% 지급(2017년 기준)을 요구하며 지난달 29일부터 20일째 파업 중이다. 가천대길병원도 파업 전운이 감돈다. 길병원 노조는 15.3%의 임금 인상, 간호 인력 충원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사측은 5% 인상안으로 맞서 24일까지 파업을 보류한 상황이다. 울산대병원도 임금 단체 협상에 난항을 겪고 지난 16일부터 19일까지 파업 찬반투표 중이다.

지난해 열악한 노동환경 등으로 파업 논란을 겪었던 모 사립대학병원에선 노동환경이 한층 나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병원 관계자는 "연차 사용 제약이나 연장근무 등이 줄어드니 적어도 행정직에서는 퇴사자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전했다.   

◇암환자 쫒아낸 병원, 매정한 병원노동자국립암센터 파업이 남긴 것

"'나는 나가면 죽는다. 나는 못 가지.'하시던 고인의 말씀이 계속 생각납니다. 환자를 방치한 공공기관의 책임을 묻습니다."

국립암센터 파업기간 동안 암투병하던 가족을 잃은 A씨의 말이다. A씨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치료받던 고인은 퇴원 조치로 병원을 옮기신지 하루만에 위독해지셨고 결국 암투병의 고통으로 잠드셨다"며 "불과 지난 4일까지만 해도 걸어서 배웅해주시던 분이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내게 된 것은 환자를 방치한 공공기관들의 책임"이라며 가슴을 쳤다.

열흘 넘게 이어지던 국립암센터 파업이 지난 16일 저녁 가까스로 종료됐다. 파업은 끝났지만, 의료현장의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18일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파업 종료 후 진료를 개시한 이틀째인 이날 오전까지 약 300명의 환자가 입원 수속을 밟았다. 일반 병실은 80%가량 가동하는 등 정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파업 마지막날인 지난 16일 암센터에 남아있던 환자는 총 70명. 평소 국립암센터 전체 560병상에 대부분 환자가 차있던 것을 감안하면 파업사태로 400명이 넘는 암환자가 대거 병원 밖으로 내몰렸던 셈이다.

그러나 파업기간 중 병원을 옮기거나 퇴원한 400여명의 환자들의 행방은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A씨의 가족처럼 사망한 암환자도 나왔고, 생사를 오가는 암치료 과정을 고려할 때 파업기간 암치료 의지를 잃은 환자도 나올 수 있다.  

암센터 관계자는 "파업 당시 환자들 대부분이 퇴원했고, 꼭 치료가 필요한 분만 전원 조치했다. 현재 병원 원무팀이 이 환자들을 최대한 빨리 모시기 위해서 바쁘게 연락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국립암센터 파업은 사측이 인금 1.8% 인상과 함께 ‘시간외근로수당’을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정부 승인도 받으면서 지난 16일 저녁 최종 타결됐다.

◇병원 밖 내몰려도 참을 人.생명 위협받는 환자들

암환자 쫒아낸 병원, 매정한 의료노동자...국립암센터 파업이 남긴 것

대개 파업은 사용자 측에 손해를 끼치지만, 의료기관에서 파업이 발생하면 환자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다. 병이 위중하고, 치료가 어려운 중증 환자일수록 피해가 크다.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의 중증 환자들은 특정 병원 또는 특정 의료인이 없으면 치료 자체가 어려워 병원을 옮기기도 쉽지 않다. 의료 전문성과 주치의와의 라포(친밀한 관계) 등이 치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립암센터 파업 사태에서도 신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환자들의 호소가 잇따랐다. 파업이 진행되던 지난 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립암센터 파업철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인은 "최소한 진료에 차질이 안 생기게 대안을 마련해두고 파업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진료를 정상화시켜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 대표는 "병원 파업은 일반 파업과 다르다. 환자들의 피해와 아우성이 병원 파업의 가장 큰 압박 변수가 되기 때문"이라며 "이번 암센터 파업사태로 많은 환자들이 상처를 받고 위축되고 분노했다. 파업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의료기관 파업에 있어 '필수유지업무 범위'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국립암센터의 경우 파업 필수유지업무 규정에서 암환자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항암주사치료실과 전국에 두 대 뿐인 양성자치료센터(방사선치료실, 양성자치료실) 업무가 아예 제외돼 환자 치료에 심각한 피해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필수유지업무 운영 및 인력 수준은 파업 전 노사간 협의를 통해 사전에 충분히 조율할 수 있다. 결국 암센터 노사는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 고스한히 피해를 안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안 대표는 "노동자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암센터 설립 목적에 맞게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인지 의문이다. 암센터 파업사태는 전국민이 지켜봤다. 필수유지업무 수준이 적절했는지 국감 등에서 반드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지적에 박노봉 보건의료노조 수석부위원장은  "필수유지업무 수준이 부족했던 것은 인정한다. 환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암센터 파업기간 중 노조가 추가 인력을 투입하는 등 노력했지만 사측의 문제도 있었고, 우리의 부족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며 "파업이 또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추후 쟁의가 일어난다면 인력투입 부분에 있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파업을 이끈 이연옥 보건의료노조 국립암센터병원지부장은 “충분히 노사가 합의할 수 있었는데도 파업을 유도하고 장기파업으로 내몬 암센터측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며 “앞으로 암센터가 직원존중을 통해 세계 최고의 암센터가 되고 국가암관리사업의 중추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바로 세우기에 나서겠다”고 했다.

전미옥·유수인·노상우 기자 romeo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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