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미국의 유명 아카펠라 그룹 보이즈 투 맨을 처음 알게 된 건 2000년대 중반, 온라인 커뮤니티 ‘알앤비 소울 동영상’, 약칭 ‘알소동’을 통해서였다.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누리꾼들은 이 커뮤니티에 몰려들어 유·무명 가수들의 라이브 영상을 공유하곤 했는데, 그룹 포맨의 멤버 신용재도 입시생 시절 이 커뮤니티에 자신의 노래 영상을 올려 유명세를 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야속한 세월과 함께, 고전적인 알엔비-발라드는 ‘한물간’ 음악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로 시작해 독립된 웹사이트로 옮겨갔던 ‘알소동’도 2010년대에 들어 문을 닫았다.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에 감동 받거나, ‘김나박이’(김범수·박효신·나얼·이수) 중 누가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지를 두고 ‘알소동’ 회원들끼리 입씨름을 벌인 일도 모두 추억의 편린이 됐다.
“많은 시간, 우리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이가 없는 것처럼 느끼곤 해요.” 14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 경기장. 8년 만에 한국을 찾은 보이즈 투 맨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시큰거렸다. 내가 ‘추억’으로 여겼던 음악이 이들에겐 ‘현재’임을 느껴서다. 이날 보이즈 투 맨은 ‘온 밴디드 니’(On Bended Knee), ‘잇츠 소 하드 투 세이 굿바이 투 예스터데이’(It’s So Hard To Say Goodbye To Yesterday), ‘어 송 포 마마’(A Song For Mama), ‘아이 윌 메이크 러브 투 유’(I’ll Make) 등 여러 히트곡을 들려줬다. 세 남자는 모든 무대에 열심이었다. 관객들은 발라드곡에서도 앉을 줄을 몰랐다. 그리움, 즐거움, 교감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1991년 데뷔한 보이즈 투 맨은 ‘엔드 오브 더 로드’(End Of The Road), ‘아 윌 메이크 러브 투 유’, ‘잇츠 소 하드 투 세이 굿바이 투 예스터데이’ 등 노래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95년 발표한 미국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와의 ‘원 스윗 데이’(One Sweet Day)가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16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보이즈 투 맨은 20년 넘게 ‘핫100 최장 1위 가수’로 기록되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팀은 부침을 겪기 시작했다. 멤버 마이클 맥캐리가 2003년 건강 문제로 은퇴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신보를 내도 예전만큼의 명성을 얻긴 힘들었다. “사람들이 사랑 노래를 원하지 않는 것만 같았죠.” 보이즈 투 맨은 말했다. “하지만 어둡고 차가운 이 세상 어딘가엔, 여전히 보이즈투맨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진짜 음악’(real music)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요.” 나단 모리슨은 이날 ‘어 송 포 마마’(A Song For Mama)를 부르던 중, 관객들의 휴대전화 플래시 이벤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여기(한국)에 속해있는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마지막 곡 ‘엔드 오브 더 로드’는 관객들 모두와 목놓아 불렀다. “우린 이 길의 마지막에 다다랐지만, 난 당신을 보낼 수 없어요”(Although we’ve com to the end of the road, Still I can’t let you go)라는 가사가, “아무도 우리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던 보이즈 투 맨의 고백에 대한 답처럼 느껴졌다. 노래가 끝나도 빈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10여분의 앙코르 연호 끝에 다시 무대 위로 오른 보이즈 투 맨은 “여러분이 머라이어가 돼 달라”며 ‘원 스윗 데이’를 불렀다. “난 알아요. 언젠가 우리는 함께 할 것이란 걸. 어느 달콤한 날에.”(And I Know eventually we'll be together, One sweet day) 보이즈 투 맨과 한국 관객들이 만든 ‘해피 엔딩’이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