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LG화학이 쌓은 배터리 기술력의 ‘만리장성’

기사승인 2020-02-20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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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LG화학이 쌓은 배터리 기술력의 ‘만리장성’[쿠키뉴스] 임중권 기자 =최근 라디오를 듣던 중 모 배터리 산업전문가의 발언에 적잖이 놀랐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에 대한 의견 때문이다. 요지는 국내 업체 간 싸움에 사실상 승자가 없고 씁쓸하다는 것이다. 기자가 놀란 이유는 미국에서 제기된 양사 간 소송에서 SK이노베이션이 조기 패소 판결을 받고 난 뒤의 발언이어서다.

무엇이 씁쓸한 것일까? 항간에 나돌던 이야기처럼 국내 기업 간 소송이 국익을 해치고 중국과 일본 배터리 업체가 성장할 기회를 마련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양사 간 소송은 팩트 중심으로 따져보는 것이 합당하고, 그에 따른 의견을 내놔야 이치에 맞다. 양사 간 소송이 다른 나라 배터리 업체에 득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현재 일본 배터리업체, 즉 파나소닉의 성장은 테슬라 덕분이다. 파나소닉은 테슬라에 배터리를 단독 공급해왔는데, 테슬라의 전기차 판매량이 급상승하면서 그 수혜를 입었다. 또 국내 배터리 업체와 제품 자체가 다르다. 파나소닉은 테슬라에 소형 원통형 배터리를 공급한다.

반면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에 주로 대형 파우치 배터리를 공급한다. 즉, 파나소닉의 고객은 소형 원통형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를 생산하는 업체만 해당된다. 따라서 아무리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싸운들 파나소닉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오히려 LG화학이 최근 테슬라와 원통형 배터리 공급계약까지 체결하면서 철옹성 같던 테슬라-파나소닉 체제에 도전장을 던진 상황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가. 중국 배터리 업체 CATL은 몇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터리를 판매하는 업체 중 하나로 성장했다. 전문가들도 장기적으로 국내 배터리 업체를 위협할 기업으로 CATL을 꼽는다. 그렇다면 CATL은 어떻게 빠르게 성장을 한 걸까?

CATL은 중국 정부가 대놓고 지원해 성장한 회사다. 중국 정부는 2016년 말 배타적인 보조금 제도를 도입 CATL이 중국 전기차 시장 내 배터리 공급을 독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배터리 생산‧공급의 시행착오를 빨리 겪으면서 기술력도 급격히 발전해 이미 국내 배터리 업체 대비 85%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CATL은 이제 중국이 아닌 글로벌 전기차 시장으로 무대를 옮기는 전략을 추진하며, 이를 위해 나머지 부족한 기술력 15%를 채우려고 한다. 이 15%를 채우기 위해서는 하이니켈 배터리 기술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다행히도 이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이니켈 배터리’란 양극재 내 니켈 비중이 최소 60~70% 이상인 배터리, 니켈 비중이 높으면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나 열이 많아져 고도의 기술력 요구되는 분야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사례에서 보듯이 최신 기술을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술을 아는 인력을 빼 오는 것이다. 그래서 CATL은 국내 배터리 업체의 고급인력을 빼돌리기 위해 연봉 3~4배를 제시하고 있다는 소위 풍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배터리 인력이 중국으로 쉽게 이직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LG화학이 영업비밀침해라는 중대한 범죄에 대해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중국 배터리 업체가 원하는 건 국내 배터리 인력의 능력이나 태도가 아닌 그들이 가진 기술을 포함한 영업비밀 정보라고 본다. 그러나 소위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이직은 제로(0)가 될 수밖에 없다.

LG화학이 소송전을 불사하며 ‘한국형’ 만리장성을 쌓는 것, 그리고 그동안 누적해 온 국가 핵심기술인 전기차 분야의 기술과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노력을 폄훼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이 타당할까?

이번 미국에서의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 예비결정이 최종결정으로 이어진다면,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배터리 업체들의 경쟁사 인력 채용 혹은 인력 빼가기에 일단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기자는 오히려 국내 업체 간의 소송 자체보다 LG화학이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소송을 걸 수밖에 없는 환경에 씁쓸함이 든다. LG화학의 소송 제기 이유가 받아들여진 건 미국 사법제도 특유의 ‘디스커버리 제도’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디스커버리 제도란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의 조사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침해자와 피침해자가 증거자료를 상호 교환하도록 하는 제도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시행되지 않는다.

SK이노베이션은 소송이 개시됨과 동시에 소송 관련 증거자료를 모두 보존해야 할 의무를 저버렸고 이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위반한 것이 됐다. 결과는 조기 패소 판결로 이어졌다.

애초에 국내에도 기업의 지적재산권을 존중할 수 있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었으면 LG화학이 미국에 소송을 제기했을까? 기자는 오랜 기간 땀 흘려 확보한 지적재산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국내의 기업환경이 더 씁쓸하다.

im918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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