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삼다수 숲길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쉰한 번째

기사승인 2020-07-04 00: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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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1년…삼다수 숲길
삼다수 숲길 (조천읍 교래리 산 70-1) 가까운 간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걷는 길 양쪽의 숲이 좋다.

올해 제주 장마는 6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제주에 내려와 1년 만에 두 번째 장마를 겪고 있다. 비가 쏟아질 때는 마치 온 세상이 물속에 잠겨 있는 듯하다. 남쪽의 한라산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 저만치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북쪽의 바다도 이미 사라졌다. 이 비가 이젠 싫지 않다. 

제주도에서 1년…삼다수 숲길
삼다수 숲길은 2 km의 사농바치길일지라도 길 안내가 잘 되어 있어 안전하게 걸을 수 있으며, 숲길 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지난 해 7월초 이곳에 왔을 때도 심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다. 그 때 설레는 마음으로 차를 타고 바닷가에 가 바람에 밀려오는 물과 그 물을 때리는 비를 보았었다. 제주 1년 여행 마지막 주를 보내는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거실에 앉아 창밖의 비를 바라본다. 열여덟 살부터 시작한 직장생활 40년을 마감하고 정년퇴직하며 이젠 천천히 살자고 다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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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은 목장 옆의 평평한 삼나무길이다.

짐 정리를 하며 어제 받아온 올레 28 코스 완주증서를 바라보니 지난 일 년 동안 걸은 길이  먼 길이었음을 알겠다. 그간 다녔던 오름과 숲길은 또 얼마나 새로웠는지. 새로 산 올레 수첩을 보며 또 한 번의 완주를 다짐하지만, 이번엔 서둘지 않고 더 오랜 시간, 더 느리게 걷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쫓아오는 이도 없고 밀어대는 이도 없는데 옛날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바쁘게 걸었다. 천천히 가자.
 
제주도에서 1년…삼다수 숲길
제주의 숲에는 6월말부터 산수국이 지천으로 핀다. 화려하고 다양한 색상의 개량종 수국과는 다른 수수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꽃이다.

자고 나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새해를 앞두고 늘 무엇인가 삶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고 살아왔지만 지나고 보면 딱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가 땀 흘린 만큼만 받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세월이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늘 세월에 속아 산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 내일은, 다음 달은, 내년엔 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살았는데, 늘 달라지는 것 없는 세월이었더란다. 내일 모레 내게 다가올 새해도 올해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렇게 뒤숭숭한 생각 속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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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걸어 들어온 삼나무 길이 끝나면서 자연림 속으로 들어간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귀를 찔렀다. 아직 새벽이다. 새해를 하루 앞두고 어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그날 밤 요양원의 초인종을 눌러야 했다고 후회하며, 꿈을 꾸는 듯 삼일이 지났다.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모시고 일가친척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내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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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미천은 한라산 동부 경사면의 빗물을 받아 제주도 남쪽의 표선면 해안까지 약 25 km를 흐른다. 비가 올 때만 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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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의 어두움 속에서 천미천 바위 위에 떨어진 산딸나무 꽃잎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가방 속에 남아 있던 부의금 봉투를 정리했다. 장례비용 지불하고 남은 돈이었다. 백만 원 단위로 묶어 정리하고 보니 천만 원이 조금 넘었다. 가방에 다시 담아 길을 나섰다. 십오 년 전이던가, 17년 전이던가 돈 때문에 어머니가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궁벽함을 눈치 챈 친구가 지방에서 올라와 나중에 갚으라며 천만 원을 어머니께 드리고 갔다. 그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가 늘 고마웠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 기르다 보니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한 내 세월이 흘러갔다. 나도 어머니도 그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를 찾아가 어머니가 품고 있었을 마음의 짐을 풀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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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깊지 않은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모양인데 땔감으로 베어 낸 나무 그루터기에서 많은 잔가지가 자라 올라 이런 모습으로 자란다고 한다.

제주 동북쪽 해안의 조천읍에서 동남쪽 해안의 남원읍까지 제주 동부의 중산간 지역을 거의 직선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남조로다. 조천읍에서부터 일주동로, 중산간동로, 번영로, 비자림로 등 서쪽에서 동쪽 해안으로 향하는 길들과 차례로 교차하고 남동쪽에서 마지막으로 서성로와 교차한 후 남원 포구에 닿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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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수 숲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삼나무와 편백나무 조림지를 만나는데 이러한 숲 속엔 관중이라는 고사리과 식물 외에 다른 나무와 풀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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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릿대 숲은 마치 이불을 펼쳐놓은 듯하다.

남조로는 양방향으로 각 한 차선 밖에 없는 옹색한 길이지만 제주 동부 관광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길이다. 이 길 좌우에 제주돌문화공원, 교래자연휴양림, 삼다수숲길, 붉은오름자연휴양림, 사려니숲길, 물영아리오름 등의 숲길과 오름이 있다. 이 길에서 번영로와 비자림로로 방향을 바꾸면 제주 동부의 거의 모든 오름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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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미천의 상류에서 용암 암반을 볼 수 있는데 오랜 세월 물 따라 구르는 돌에 둥글게 깎였다. 크고 작은 물구덩이에서 산짐승과 새들이 목을 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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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 흙이 되어가고 있는 나무에서 목이버섯이 피었다. 흙이 되기 전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삼다수숲길(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 70-1)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걸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은 길이다. 삼다수숲길은 ‘제주삼다수’ 취수장 뒤의 산림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말과 소를 먹이거나 사냥을 위해 다니던 길과 임도를 십여 년 전부터 다시 연결해 제주 동부 숲을 살필 수 있도록 1998년 제주도개발공사와 교래리의 협력으로 만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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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처럼 숲의 나무도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입구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찾는 이가 많지 않았는데, 숲길 걷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최근에는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삼다수숲길을 걷고자 할 때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주차 문제와 길 입구 찾아가는 방법이다. 공식적으로는 교래리종합복지관에 주차를 하도록 안내하고 있지만 삼다수숲길 입구까지 약 2km를 걸어가야 하는데 부담스러운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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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왼쪽엔 새로 심은 삼나무가, 오른쪽엔 본래 이 산의 주인인 활엽수가 자라고 있다. 아마도 조만간 삼나무 숲의 제주조릿대는 사위기 시작할 것이다.

남조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교래 자연휴양림을 지나면 비자림로와 만나는 교래사거리다. 여기서 300여 미터쯤 직진하면 왼쪽에 교래종합복지회관이 있고, 천미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보이는데 그 다리 끝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보인다. 이 길로 2km쯤 가면 삼다수 숲길이다. 다행이 최근 삼다수숲길 입구 가까운 곳에 간이 주차장이 몇 곳이 마련되어 뙤약볕 아래 왕복 4km의 지루할 수도 있는 길을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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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바라보며 쉬어가라고 한다.

삼다수 숲길은 체력과 시간에 맞추어 걸을 수 있도록 짜여 있다. 꽃길이라 불리는 제1 코스는 약 1.2km인데 30분 정도 걸으면서 삼다수 숲길의 여러 특징을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길이다. 제1 코스 반환점에서 테우리길이라는 이름의 제2코스로 접어들면 약 5.2 km를 걷게 된다. 테우리는 과거에 말과 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테우리길에서는 인공조림지인 삼나무숲과 편백나무숲은 물론 한라산 동쪽 경사면의 물들이 모여 흐르는 천미천을 살필 수 있으며 다양한 나무들이 경쟁하고 양보하며 자리를 잡고 있는 편안한 자연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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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들이 모여들어 물을 마시는 노릿물이다. 건너편 숲이 궁금해 물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근처는 노루, 오소리, 꿩을 사냥하던 곳이라 한다.

제2 코스 분기점에서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제3 코스의 8.2km를 걷는다. 제3 코스는 ‘사농바치길’이라 하는데 사냥꾼을 뜻하는 제주어다. 사농바치길에서는 천미천의 다양한 모습을 살피고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서 탐방로 반환점으로 설정해 둔 말찻오름, 오름 분화구에 물을 담고 있는 물찻오름 경사면을 살피며 숲이 변해가는 과정까지도 얼핏 볼 수 있는 길이다. 어디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숲이 매우 울창하고 깊지만 문득 천미천 건너 오름의 나무들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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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꽃은 이미 지고 씨앗이 자라고 있다. 박새꽃 군락지를 만나면 삼다수 숲길의 사농바치길을 절반쯤 걸었다.

이른 봄에 찾아오면 제주 세복수초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고, 여름이라면 산수국의 수수한 아름다움을 품게 될 것이며, 가을이 깊어지면 천미천가의 붉은 단풍이 마음을 달굴 것이다. 삼다수 숲길은 동백동산 숲길보다는 다양하고, 올레길이나 한라산둘레길보다는 편리하게 제주의 다양한 숲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적어도 세 번은 찾아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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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순 제주의 숲엔 산수국 외에 이렇다 할 꽃은 보이지 않았다. 꽝꽝나무의 보호 속에 하늘말나리 꽃봉오리가 하늘을 향해 꽃잎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온통 초록의 숲속에서 짙은 주황색의 꽃 한 송이는 온 숲을 물들이고도 남을 만큼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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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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