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근데, 진짜를 진짜 많이 써?”

기사승인 2020-07-09 0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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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진짜를 진짜 많이 써?”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한국인이면 아니 근데 솔직히 진짜를 쓰지 않고서는 문장을 시작할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 올린 자기 성찰 글이 이정도의 반응을 얻을 줄 몰랐습니다. 지난해 8월 한 네티즌이 트위터에 올린 글은 2만 리트윗(공유)이 됐습니다. 이 글에 대한 공통된 반응은 ‘솔직히 인정한다’로 정리됩니다.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불가능했다’고 고백한 이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아니’ ‘근데’ ‘진짜’ ‘○○’를 현대 트위터 문장의 4대 시작 요소로 명명하고 그래프로 나타낸 한 네티즌의 그림은 입소문을 타고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지난 4월 올라온 이 글은 3만4000 리트윗을 기록했습니다.

‘아니’ ‘근데’가 뭐길래 일상 속 대화에서 많이 쓰이는 걸까요. ‘아니’ ‘어쨌든’ ‘그런데’ 등은 언어학적으로 담화표지에 분류됩니다. 담화표지는 발화의 명제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발화를 연결하거나 화자의 태도를 표시하는 등 기능을 수행하는 언어 요소를 말합니다.

담화표지는 화자-청자 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대화 마무리, 혹은 새로운 화제로 진입해야 할 때처럼 국면이 전환되는 순간에 완충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는 부정의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주의 집중의 효과를 나타내 화제 전환을 하는 작용도 합니다. ‘근데’는 앞선 화제를 이어서 심화, 발전시키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2014년 한국어 의미학회에서 발간한 학술지 『한국어의미학』에 실린 논문 ‘복합형 담화표지의 의미기능 연구’에 따르면 ‘근데’ 앞에 ‘아’ 혹은 ‘아니’가 붙느냐에 따라서 기능이 달라집니다. ‘아니 근데’는 화제일탈, 화제복귀, 시차를 둔 수정 요청의 의미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아 근데’는 화제 심화, 화제 일탈, 발언권 확보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죠. 

“아니 근데, 진짜를 진짜 많이 써?”
사진=SBS 제공
‘아니 근데’는 말 끼어들기가 생명인 예능인이 인증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8년 코미디언 양세형은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나와 “수없이 많이 실험해보니 ‘아니’, ‘근데’만으로는 안 된다”며 “둘을 붙이면 잘 된다”는 비법을 전수했습니다.

‘진짜’는 ‘아니’, ‘근데’와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매우’ ‘너무’ 처럼 다른 부사의 정도를 한정하는 부사인 ‘정도부사’로 분류되는데요. 한국어 형태소 분석의 표준으로 사용되는 ‘세종 말뭉치’(국립국어원이 지난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신문, 잡지, 소설 등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해 확보한 2억 어절 규모의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25개 정도부사가 구어에서 사용되는 빈도를 따져보니 ‘진짜’는 5번째로 높았습니다. 화자와 청자의 심리적인 거리가 멀 경우에는 ‘정말?’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울 때는 ‘진짜?’가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떨까요.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아니’ ‘근데’ ‘진짜’가 많이 쓰이는 이유나 배경에 대해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히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은 없다”면서도 “문장에 없어도 의미상 전혀 영향이 없는 군더더기다. 일단 입 밖으로 뱉어 발언권을 남에게 넘기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의도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어 의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철우 안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들 요소는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고 동조하고 같이 놀라는 걸 보여주는 교감 기능이 크다”면서 자주 쓰이는 배경을 추측했습니다. 박 교수는 “순서와 조합에 따라서 어감과 의미가 다양하다. 젊은층이 여기에 흥미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고 부연했습니다.

이정애 전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음’, ‘어’, ‘아’ 처럼 대화 여백을 채우는 일종의 ‘필러(Filler·추임새)’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젊은 세대들이 서로 간의 결속력을 확인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규칙으로서 작용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담화 표지를 한국에서 유달리 많이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이 교수는 “추임새를 대화 중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현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jjy4791@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