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점은 현재의 시각에서 봐도 놀라운 상황과 대사들이 영화에 나온다는 겁니다. 어느 날 홀로 딸을 키우는 안토니아에게 아내를 잃고 혼자 지내는 ‘바스’가 찾아와 청혼합니다.
“당신이랑 나, 결혼하면 어떨까요. 당신은 과부고 나는 부인이 없어요.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예요. 내 아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해요”
“난 당신의 아들이 필요 없어요”
“그럼 남편도 필요 없어요?”
“왜 필요하죠?”
안토니아의 딸 다니엘 역시 기존의 가치관을 깨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엄마, 저 아기 가질래요”
“결혼을 하는 건 어떠니?”
“남편은 필요 없어요”
안토니아와 다니엘 그리고 다니엘의 딸 테레사는 임신과 출산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며 흔히 말하는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시대가 정한 기존 질서에 맞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이자,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돌연변이기도 합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특히 온라인상에서 쟁점이 된 건 이겁니다. 사유리씨의 출산이 ‘아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없는 환경에서 자랄 테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처는 고스란히 아이의 몫이 될 것이란 견해입니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이기적인 선택’이 낳은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죠.
생각해봅니다. ‘나는 내 가정을 선택해 세상에 태어났는가’ 아닙니다. 누구도 자의로 출생할 수 없고, 가족의 조건 또한 선정할 수 없습니다. 만인에게 평등한 전제가 사유리씨의 아이라고 해서 다를 리는 없습니다. 반대로 말해, 모든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태어납니다. 누군가의 선택만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부모가족은 비정상적인 형태의 가정인가’ 이 또한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 한쪽의 사망, 이혼, 별거, 유기 혹은 미혼모, 미혼부 등의 이유로 혼자서 자녀를 키우며 부모 역할을 담당하는 한 부모와 자녀를 한부모가족이라 부릅니다. 가족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일 뿐, 옳고 그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한부모가족 아이는 무조건 결핍과 상처를 안고 자라는가’ 역시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면은 있겠지만, 여기에 속한 모든 이를 불행하다고 치부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가 모두 행복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모가 있다고 해서 바르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아이는 어디에서 태어나는 것인가’ 그 모체는 임신과 출산을 선택한 사유리씨가 아니라, 기존 가부장적 풍토와 질서를 토대로 한 우리의 관념은 아닐까요. 가족 구성에 있어 남성은 불가결한 존재이며, 여성이 독립적으로 만든 대안적 삶은 용납할 수 없는 편견 말입니다. 권위주의적 사회와 이로 인한 비합리성 속에서 살았던 이들에게 자아실현, 욕구표현을 하는 여성의 선택이 모난 돌처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유리씨는 아이가 느낄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고 운동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태권도를 한다고 해서 그가 아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같이 태권도를 하는 엄마는 될 수 있죠. 중요한 건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편할 이 이야기들을 꾸준히 그리고 발전적으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누구와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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