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라이엇이 자신들의 음악을 홍보하려고 ‘리그 오브 레전드’를 만들었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그룹 K/DA의 신곡 ‘모어’(MORE) 뮤직비디오에 달린 댓글이다. 장난 섞인 반응이지만, 라이엇이 제작한 그룹 K/DA의 실제 인기는 장난이 아니다. 지난 7일 발매한 첫 미니음반 ‘올 아웃’(ALL OUT)은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에서 176위로 데뷔했다. K팝 여성 가수 가운데 이 차트에 이름을 올린 건 이번이 일곱 번째다. 데뷔곡 ‘팝/스타즈’(POP/STARS)는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 1억회 이상 스트리밍됐고,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4억 뷰에 달한다.
대중음악계에서 K/DA와 같은 ‘가상 아이돌’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태초에 사이버 가수 아담이 있었다. 1998년 데뷔해 CF 모델로 섭외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이듬해 홀연히 사라져버린 비운의 사나이. 일본에선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2D 아이돌’ 하츠네 미쿠가 13년째 활동하고 있고, 영국 인기 밴드 블러의 프런트맨 데이먼 알반과 만화가 제이미 휴렛은 1998년 캐릭터를 앞세운 가상의 인디밴드 고릴라즈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SM엔터테인먼트가 현실 세계의 멤버와 그들의 가상 자아인 아바타가 결합한 그룹 에스파를 내놓으면서, 가상 아이돌이 미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가상 아이돌의 강점은 확장성과 위기관리에 있다. 이들은 물리적인 시공을 초월한다. 특히 최근 급속도로 확산하는 메타버스(metaverse·현실사회를 모방한 가상세계)와 맞물려 가상 아이들의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메타버스가 대안적 공간으로 부상한 데다, AR(증강현실)·VR(가상현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상 아이돌의 확장성은 무한대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다. 공적 활동은 기획사의 완전한 통제 아래서 이뤄지고 관리해야 하는 사생활은 없어서다. 가상 아이돌은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다. 단체 채팅방에서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다가 팀을 떠나게 되는 일도 없다. 가상 아이돌은 ‘흠결 없는 존재’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콘텐츠로서의 높은 완성도가 가상 아이돌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상품-소비자 관계로 정확하게 치환될 수 없다. K팝은 진정성이 중요한 시장이다. 아이돌과 팬 사이의 정서적인 교류는 그래서 중요하다. 내(팬)가 그들(아이돌)을 사랑하듯 그들도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 내가 그들에게 위로받듯 그들도 내게 위로받는다는 믿음, 나와 그들이 함께 성장한다는 믿음…. 라이엇 게임즈는 K/DA 멤버 개개인에게 구체적이고 연속적인 세계관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실재하는 존재로 느껴지도록 공을 들여왔다. SM엔터테인먼트는 에스파의 아바타 멤버들을 구현하기 위해 AI(인공지능)를 동원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팬들의 감정적인 몰입을 유발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상 아이돌을 보며 그들의 개발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실재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진심을 느낄 수 있을까.
영화 ‘그녀’(Her)에서 대필작가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고 행복을 되찾는다. 급기야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어쩌면 감정적인 교류는 실체의 유무와 상관없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의 말처럼 미래엔 “초거대 버추얼 세상이 올 것”이며, “앞으로 AI와 로봇을 통해 개인화된 된 수많은 아바타가 생겨날” 수도 있다. 미래의 K팝이 태동하는 지금. 가상의 아이돌은 필연적으로 철학적인 질문을 남긴다. 인간이 ‘인공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wild37@kukinews.com / 사진=K/DA SNS, SM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