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낯선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가려면

기사승인 2021-01-21 07: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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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낯선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가려면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7년 동안 일한 회사로부터 버림받았다.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 수 없다. 책상이 엉뚱한 곳으로 배치되고 업무에서도 배제된다. 회사는 1년 동안 지방에 있는 하청 업체로 파견 근무를 명한다. 그곳에서도 마땅한 일이나 앉을 자리는 없다. 밤마다 안주 없이 팩소주로 마음을 달래고, 1부터 365까지 적은 숫자를 하나씩 지워가는 날들. 파견 기간 1년을 채우고 다시 본사로 복귀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감독 이태겸)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파견 근무 지시를 받은 정은(유다인)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버티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자신이 처하게 된 환경에 좌절하던 정은이 선택한 건 현장 작업복을 입는 것이다. 하지만 수리를 위해 송전탑을 오르는 건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한 걸음도 떼지 못하던 정은은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먼저 손을 내민 막내(오정세)의 도움으로 하늘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 영화다. 성장을 통한 어설픈 희망을 보여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쉽게 제공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정은과 같은 상황 속에서 묵묵히 하루를 버텨내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존중한다는 듯 지나치게 안타깝고 억울한 일로 그리지도, 상황의 열악함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저 정은이 느끼는 감정과 선택들을 하나씩 보여주며 조용히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간다. 정은에게 몰입해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다는 감정이 피어나기보다, 그가 버티는 하루와 그날의 노동이 겉에서 보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그저 묵묵히 지켜보게 된다.

[쿡리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낯선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가려면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극 중 노동자들이 한 걸음씩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하고 있다면, 영화는 한 걸음씩 일과 사람에 가까이 다가간다. 초반부 비춰지는 정은이 본사에서 겪은 치욕적인 일들, 파견 업체에서 겪는 난감한 상황들은 낯설지 않다. 신문 기사에서, 여러 영화에서 봤던 어느 노동자의 모습이다. 영화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식으로 다루거나 메시지를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정은’이라는 이름의 여성 노동자로서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바꾸고 극복하는지, 어떻게 동료와 관계를 맺고 무엇을 배우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도 몰랐던 곳이 송전탑을 수리하는 하청 업체라는 사실은 중반부에 들어서야 관객들에게 공개된다. 송전탑이 가까이에서 보면 어떤 각도로 보이는지, 얼마나 까마득하고 높은지 알게 된다. 그곳에 올라가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손은 어떻게 하고 발은 어떤 모양으로 짚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밧줄에 목숨을 의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고 밧줄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전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동시에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알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정은인 동시에 노동이다. 노동과 노동자의 숭고함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건 영화가 관객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무기다.

높은 곳에서 밧줄에 매달린 모습을 위태로운 한국의 청년들에 비유했던 영화 ‘버티고’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버티고’가 청춘들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으며 ‘버티라’고 위로하는 영화였다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청춘과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죽음과 삶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음을 알려주고 생명줄의 의미를 주목한다. 또 “여자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들에겐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해고예요”, “밑에 보지 마시고 위에만 보고 올라가세요. 그냥 계단 올라가듯이 한 발짝씩” 등 현실적인 대사들은 스크린이 올라간 이후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오는 28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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