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저’ 운수 좋은 전두환 ‘3S’ 정권 유지...5공 경제이야기 [알경]

김동운 / 기사승인 : 2021-11-27 0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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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경]은 기존 '알기쉬운 경제'의 줄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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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를 전하고자 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사망한지 이틀째인 2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이 놓여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전두환씨가 지난 23일 사망했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1980년 8월27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존속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은 마치 롤러코스터와 비슷한 상황이였죠. 1970년대 경제발전의 주역이던 중화학공업은 원유가격이 2배 이상 상승하는 ‘오일쇼크’가 찾아오며 전후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1.5%)을 기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처럼, 전두환 정부 시절 한국은 어두운 그늘 속에서 빛을 향하며 점점 걸어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였는데요, 1980년대 당시 주요 경제 이슈들에 대해 한 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진 왼쪽부터) 김재익 수석,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한 과기처 차관. 이들 모두 1983년 10월 9일 아웅 산 폭파 사건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연합뉴스 제공

1980년대 한국경제 설계자, 김재익 경제수석

전두환 정부 시절 국내 경제 정책을 이끌었던 사람은 김재익 경제수석입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했죠. 이때 나눈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김 수석은 전 대통령에게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하겠습니다. 또한 저한테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조건을 말했고, 전 대통령은 “이제 대한민국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당신이 대통령이다”라는 말로 화답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김 수석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김 수석은 1979년 오일쇼크가 터지며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을 1982년 7%로 줄여버리죠. 이후에도 김 수석은 1983년 이후 물가 상승율이 3.5%를 넘기지 않도록 억제합니다. ‘3저 호황’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됐던 것을 감안하면 김 수석의 경제 정책은 성공적이였다고 할 수 있죠.

이외에도 ▲수입자유화 조치 ▲중화학 산업 구조조정 ▲부가가치세 도입 ▲공정거래법 통과 등 합리적인 경제조치를 잇달아 성공시켰습니다. 특히 부가가치세 도입은 김종인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와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금융실명제도 김재익 수석이 도입하려고 했던 정책중 하나입니다. 지하경제를 끌어올려 투명성을 담보하고, 내수시장을 활발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죠. 하지만 정치인, 특히 신군부 인사들이 자신들의 비자금 조성이 어려워 질 것을 경계하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결국 측근들의 반발에 못 이긴 전두환이 생각을 바꾸면서 시행에는 실패했다고 하죠.

이후 김재익 수석은 미얀마 아웅 산 묘소 폭파 사건에 휘말려 안타깝게 사망하고 맙니다. 김 수석이 한국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 3월 1일 서울 밤 풍경.   연합뉴스 제공

‘단군 이래 가장 호황’, 3저호황이 오다

3저호황은 전두환 정부 임기 후반인 1986년부터 노태우 정부 임기 초인 1989년까지 나타난 경제흐름으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를 의미합니다. 당시 일본은 2차대전 이후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해내며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죠. 이같은 성공의 배경은 정부가 주도한 ‘엔화 저평가’를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가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를 체결, 엔화 저평가 시기가 끝나게 됩니다. 이는 일제 상품들의 매력이 해외시장에서 큰 폭으로 떨어지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죠. 반면 한국은 상대적인 수혜를 얻게 됩니다. 미국의 달러도 함께 떨어짐과 동시에 수출 경쟁력도 자연스럽게 확보, 무역수지가 점차 증가하게 됐습니다.

또한 오일쇼크 이후 전 세계에서 원유 개발 사업이 시작되자, 산유국들은 시장지위 유지를 위해 석유를 저렴한 가격에 풀었습니다. 또한 미국도 경기 부양을 위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면서 비로소 ‘3저 호황’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한국경제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연평균 12.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통계작성이 시작된 60년대 이후 처음으로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했죠. 실업률도 4.0%에서 2.5%으로 떨어집니다. 이런 경제호황 속 많은 국민들이 ‘중산층’에 편입되기에 이르죠.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사망했다.   연합뉴스 제공

‘3S 정책’과 끝내 돌려받지 못한 970억원

경제성장과 함께 전두환 정권에서 주목할 사항은 ‘3S 정책’입니다. 3S 정책은(Sex, Screen, Sports)를 의미합니다.  프로스포츠의 시작, 정치를 제외한 분야의 검열 완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국풍81 개최 등 국민들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등이 크게 늘어났죠. 물론 이 볼거리와 관심사들에서 ‘정치’만큼은 절대적으로 제외됐지만 말입니다.

여기에 정점을 찍은건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입니다. 전두환 정부는 노태우 정무장관을 필두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전 대한체육회장 박종규를 동원해 끝내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 개최할 수 있게 만들었죠.

한국사에 기록될 빛나는 업적이 기록될수록 어둠은 더욱 깊어져갔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군화발에 짓밟혔고, 경제단체들을 흔들어 신군부 인사들과 정치인들은 비자금을 착복했습니다. 정권의 정점에 서 있던 전두환씨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전두환씨는 재임 중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기업들로부터 약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민주화가 진행된 이후 전두환씨는 1997년 뇌물수수와 군형법상 반란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청구 받았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2628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부과받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모두 완납하고 국민들에게 사죄했죠. 반면 전두환씨는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하며 죽기 전까지 자발적으로 납부한 적이 없습니다.

23일 오전 전두환씨가 죽고 난 뒤 남은 추징금은 970억9000만원입니다. 29만원 밖에 없다고 말하던 전두환씨는 추징금 선고액 2205억원 중 현재까지 총 1234억9100만원을 집행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미납한 추징금의 환수는 영원히 불가능할 전망이라고 하네요.

다만 여당에서 전두환씨의 잔여 추징금 환수를 위한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영욕의 삶을 살았던 전두환씨는 죽어서도 자신의 과오를 청산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김동운 기자 chobits3095@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