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일하는, ‘악인들을 잡기 위해 한 길만 잡는 남자’라니. 엿이나 먹으라지. 안기부가 무고한 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씀드릴게요.” 누리꾼 A씨는 지난 16일 SNS에 영어로 이렇게 적었다. JTBC 주말드라마 ‘설강화 : 스노드롭(snowdrop)’(이하 설강화)가 방영을 앞둔 때였다. A씨는 ‘설강화’가 안기부 요원 이강무(장승조)를 묘사하는 방식과 남파 간첩 임수호(정해인)이 운동권 대학생으로 오인 받는다는 설정에 분노했다. “안기부는 학생 운동 단체에 프락치를 보내 균열을 야기했고, 학생들에게 스파이(간첩)라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A씨가 올린 글은 SNS에서 2만 번 넘게 공유되며 널리 퍼졌다.
지난 18일 막을 올린 ‘설강화’가 민주화 운동을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방영 중지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엔 31만여 명이 참여했고, 광고·협찬사들은 줄줄이 제작 지원에서 손을 뗐다. 청년단체 세계시민선언은 오는 22일 이 작품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JTBC는 “역사 왜곡과 민주화 운동 폄훼 우려는 향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오해의 대부분이 해소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성난 여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시청자들의 우려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작 의도를 관철시키려고만”(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한 탓이다.
‘설강화’가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해외에도 공개되는 만큼, 이 작품이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 전파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익명을 요구한 연예계 관계자 B씨는 “해외 시청자들은 한국 내 민주화 항쟁을 깊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 대중과 견해 차이가 첨예하게 발생하는 것”이라고 봤다. A씨 역시 “일부 언론사가 한국 내 연예계 이슈를 영어로 전하고 있지만, 보도 내용이 한정적이다. 엉성한 번역 때문에 ‘설강화’ 인물 소개나 시청률 등이 잘못 알려지는 사례도 많다”고 했다. A씨가 ‘설강화 사태’를 해외에 알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운동권 출신 부모님을 둔 A씨는 “내게 ‘설강화’의 역사 문제는 남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부 해외 팬들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작품을 옹호하며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이 해외 팬덤과 국내 대중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양상을 띠기도 했으나, A씨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러시아, 브라질, 페루 등 여러 국가의 팬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공감해줬다”고 했다. 자국 내 독재, 역사수정주의와 투쟁해온 경험이 ‘설강화’ 보이콧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미국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도 지난 19일 ‘설강화’ 논란을 짚는 글이 게시돼 많은 이용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온라인에서 ‘콘텐츠 국경’이 사라진 만큼, 제작자들에게 더욱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설강화’가 국내 시청자를 도외시하고 해외 팬덤에만 의존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콘텐츠는 거의 없다”면서도 “방송사와 제작진은 왜 이런 의혹이 나왔는지, 시청자들이 뭘 걱정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자신들 의도만 주입하려하면 소통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B씨는 “콘텐츠의 영향력이 이전과 견줘 매우 커졌다. 제작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가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나 피해를 주지 않는지 통렬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