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상선언’(감독 한재림)에 비범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 혼란 속에서 각자의 단단한 면과 연약한 면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딸과 함께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라탄 재혁(이병헌)도 그중 하나다. 재혁은 이상한 낌새를 가장 먼저 눈치채지만, 재난이 벌어지는 걸 막진 못한다. 영화에서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있어 보이는 유일한 인물이자, 관객이 가장 의지할 만한 인물이 재혁이다.
재혁에게 느껴지는 신뢰의 일부분은 그를 연기한 배우 이병헌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그가 출연한 한국영화에 대한 믿음과 안정적인 연기력, 익숙한 중저음 목소리 등 그동안 쌓아온 데이터가 무의식적으로 재혁을 향해 믿음을 갖도록 이끈다. ‘비상선언’이 개봉하기 전인 지난달 28일 화상으로 만난 이병헌은 평범한 재난 영화가 아닌 것에 믿음이 갔다고 했다. 극도의 혼란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보는 관객이 한 번 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거란 얘기였다.
“처음 ‘비상선언’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냥 재밌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죠. 스토리가 긴박하게 끝까지 달려가는 걸 보고 굉장히 힘 있는 시나리오라고 생각했어요. 재난 장르지만 사실 재난 자체보다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재난 상황을 헤쳐가는 과정을 그리잖아요. 인간의 이기심이 드러나는 순간도 있고, 인간이라서 할 수 있는 희생정신이 발현될 수도 있죠. 여러 가지 선택지 중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뭘까 하고 관객들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을 계속 생각하게 할 것 같아요. 인간성을 조금씩 잃어가는 지금 시대에 한 번 생각해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던지는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한재림 감독은 ‘비상선언’ 각본을 2019년 7월에 썼다. 준비 기간을 거쳐 본 촬영은 2020년 5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났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존재조차 없던 시기에 기획돼 팬데믹을 관통해 2022년 8월 관객들에게 도착한 영화다. 팬데믹 기간에 촬영한 배우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촬영을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어요. 코로나19를 얘기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어느 감성에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 상황인 현실에서 우린 그와 감성이 맞닿은 작품을 찍고 있었죠. 이것이 어떤 영향이 있을까 고민도 했어요. 영화가 다 만들어지고 편집본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팬데믹을 겪고 영화를 보니까 몰입감이 엄청났거든요. 충분히 저런 상황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몰입감 있게 영화를 보게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시사회에서 몰입이 심해서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의도치 않은 팬데믹 상황 때문에 ‘비상선언’을 보는 경험이 특별해진 것 같아요.”
마음을 움직이는지, 아닌지. 이병헌이 작품을 선택할 때 생각하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이다.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각본을 읽고 푹 빠져서 재밌게 읽으면 그때부터 다양한 것들을 고민한다. 온전히 자신의 감성에 치우친 선택이다. ‘비상선언’의 재혁, tvN ‘우리들의 블루스’ 동석처럼 평범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도 그의 감성 영향이라 했다.
“제 감성이 평범한 사람에 가까워서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편해요. 배우들은 직접 경험한 걸 연기할 때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더 확신을 갖고 연기하지 않나 싶어요. 킬러나 스파이처럼 아주 극단적인 직업군은 상상을 토대로 연기해야 해서 확신이나 자신감이 덜할 수 있거든요. 제가 연기를 오래 했다고 습관처럼 나오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늘 내 안에서 반짝하는 걸 표현했으면 좋겠어요. 엉뚱하다면 엉뚱하고 창의적이라면 창의적인 연기요. 습관처럼 나오는 연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비상선언’은 이병헌이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 이후 2년 7개월 만에 관객들을 만나는 영화다.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처음이다. 이병헌은 이전처럼 더 많은 관객이 영화관을 찾길 바랐다.
“영화관이 너무너무 침체하고 위기였던 긴 기간을 지났어요. 영화가 개봉했을 때 이전처럼 관객들이 찾아줘서 극장이 붐비는 희망적인 상황들이 보이고 있어요. 이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기고 영화가 발전하는 과정이 반복해서 이뤄지면 좋겠어요. 그래도 우리 영화가 제일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