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수준에선 월세가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싸요. 전세 계약을 했던 2년 전보다 월세가 1.5배 뛰었어요. 전세 사기 걱정은 줄었지만, 월세 부담에 허리가 휘어요.”
경기 안양시에 사는 대학생 박모(25)씨는 살던 전셋집에서 나와 최근 월세로 작은 오피스텔을 얻었다. 처음엔 이번에도 전세로 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전세 계약서까지 썼지만, 집주인의 파기로 무산됐다. 때마침 전세 사기 사건이 화제가 됐다. ‘차라리 잘됐다’며 월세로 눈을 돌렸다.
월 40~50만원대였던 월세는 2년 만에 60~70만원으로 크게 올랐다. 박씨는 “전세 사기 뉴스가 쏟아지면서 (부동산 계약을 앞두고)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다”며 “월세가 부담됐지만, 부모님이 일부 도와준 전세금을 자칫 떼일 수 있다는 걱정에 마음을 돌렸다”고 말했다.
곳곳에서 전세 사기 이슈가 터지며 청년들이 전세 대신 월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전세 사기 피해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최근 서울 신촌 지역 오피스텔을 계약한 대학생 A씨의 기본 월세는 80만원이다. 관리비까지 합치면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그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라며 “식비를 줄이며 생활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혹시 나도 전세 사기?
주거 불안을 겪는 청년들에게 전세 사기 피해는 공포 그 자체다. 서울 신길동에 전세로 거주 중인 직장인 김모(29)씨는 “부동산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사회에 나와 방을 구할 때 ‘사기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며 “전세 사기가 언론을 통해 매일 보도되고 물건(집)을 보는 능력도 없어서, 다음 계약에선 불안하게 원리금 상환하고 이자를 내느니 마음 편하게 월세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올해 가을철 전세 퇴거를 앞둔 주모(32)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내가 전세 사기를 당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공포감이 크다”며 “만약 전세 사기를 당하면 ‘짐을 빼야하나’ ‘경매하게 되면 매매하는 것이 낫나’ ‘고소는 어떻게 진행하나’ 등 시뮬레이션을 떠올릴 정도”라고 했다.
청년들이 특히 전세 사기를 두려워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지난 1월 국토교통부의 발표에 따르면 전세 사기 피해신고 10명 중 7명은 주택 마련 비용이 넉넉하지 못한 2030 청년층이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이른바 ‘건축왕’의 피해자인 최모(37·여)씨는 전세라면 치를 떤다. 그는 “많이 알아보고 구한 신혼집이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허망했다”라며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잇따라 극단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더 아팠다”고 했다.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 오피스텔 전세 피해자인 이모(30대)씨도 “입주해서야 깡통전세라는 걸 알았다”며 자신이 전세 사기의 피해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 토로했다.
월세 상승으로 악순환
17일 방문한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 인근 지역 월세는 가뭄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빌라와 오피스텔, 원룸엔 성신여대와 고려대, 국민대 등 인근 대학생들과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젊은 직장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거래량이 크게 줄어 좋은 매물이 나오면 임차인이 줄을 설 정도다. 이 지역에 거주 중인 대학생 양모(23)씨는 “지금은 월세로 살고 있어서 걱정이 없지만, 다음 부동산 계약할 때를 생각하면 두렵다”고 말했다.
부동산도 전세 사기 이후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있다. 성신여대 로데오거리 한 공인중개소를 운영하는 중개사 B씨는 “월세도, 전세도 매물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번화가를 지나 빌라와 오피스텔이 밀집한 구역은 사정이 나았지만,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개사 C씨는 전·월세 매물을 소개해주며 “요즘 정말 매물이 없다”고 했다.
월세 매물은 더 보기 어렵다. 대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어 매물이 나올 여지가 있지만, 요즘 분위기에선 확신하기 어렵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며 외국인 학생 등 이 지역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늘어 수요가 더 많아졌다. C씨는 “전세 사기 뉴스가 잇따르면서 전세보다 월세를 찾는 수요가 많아졌다”며 “지난해와 비교하면 월세가 5~6만원 정도 올랐다”라고 말했다.
월세 수요가 늘어난 건 대학가 만이 아니다. 경기 안양시 한 공인중개소를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D씨는 “집값 하락에 역전세 등으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어 있는 상황”이라면서도 “월세를 찾는 사람들은 늘었다. 젊은 층은 구축 빌라보단 오피스텔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신축 빌라나 오피스텔의 월세가 과거보다 올랐다”고 했다.
서울 사당에 거주하는 직장인 최모(33·여)씨는 “요즘 방 1, 거실 1 기준 월세 90만원이 기본”이라며 “2년 전에는 70만원 정도였다. 지인이 인근으로 이사를 오려다가 월세는 너무 비싸고 전세는 사기 당할까봐 무서워서 이사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월세 상승이 부담 되는 청년은 낙후된 지역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집으로 옮겨간다. 집값 상승·전세 사기가 두려워 월세로 내몰리고, 다시 월세 상승으로 주거난에 시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점점 멀어지는 ‘내 집 마련’의 꿈
월세 부담이 커지며 청년들의 ‘내 집 마련’ 꿈도 멀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 직장인 강모(33·여)씨는 “월세만 130만원”이라며 “월급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라고 했다. 이어 “서울 월세가 전반적으로 많이 올랐다”라며 “관리비나 교통비를 감안하면 비싼 월세라도 회사 앞에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내 집 마련 꿈은 멀어졌다”고 했다.
월세로 거주 중인 직장인 임모(29)씨도 내 집 마련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임씨는 “임금보다 물가가 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 저축도 힘든 상황”이라며 “근로소득이 높지 않은데 월세까지 내야 하니 전세자금 마련이 어렵다. 청년에게 지원해주는 전세 대출도 신청한다고 다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계약할 집을 고를 때 심사 기준이 까다롭다. 차라리 월세가 더 마음 편하다”고 했다.
정부의 전세 사기 피해 특별법에 대한 기대도 높지 않았다. 여야는 지난 16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토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논의했지만, 이번에도 통과되지 못했다. 특별법 관련 소위만 네 번째다.
인천 건축왕 전세 사기 피해자인 최씨는 “인천 미추홀구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정부가 경매로 넘어가면 우선매수권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러려면 전세 사기로 목돈도 없는 상태에서 대출을 더 늘려야 한다”며 “이 집을 원치 않고 떠밀리듯이 경매로 매입해 살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사기를) 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사회초년생인 김씨도 이렇게 말했다.
“확정일자와 등기부등본 등 국가가 보증한 문서를 임대인이 마음대로 바꾸는 전세 사기도 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사기꾼들이 작정하고 사기를 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에 첫발을 뗀 청년들이 떠안는 구조 아닌가요. 한숨만 나옵니다”
임지혜 심하연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