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0)

피테르 브뤼헐은 왜 ‘바벨탑’을 그렸을까?

입력 2024-01-25 10: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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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0)
피테르 브뤼헐, 바벨탑, 1563년, 패널 위에 유채, 114×155cm, 빈 미술사 박물관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0)
피테르 브뤼헐, 바벨탑, 1568년경, 패널에 유채,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디포(Depot Boijmans Van Beuningen; 아츠 디포) 

​브뤼헐(Pieter Bruegel, 1525년경~ 1569)은 1552년 로마에 갔을 때 콜로세움을 보았고, 그림 속의 바벨탑은 콜로세움에서 그 형상을 가져왔다. 

중세 이후의 서구인에게 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이교도 제국 로마의 모습은 바빌로니아를 떠올리게 했다. 

브뤼헐은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을 바벨탑의 구조적 특징으로 차용함으로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교도 문명을 상징하려 했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를 보면,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 항구에 바벨탑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기 위한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공사는 완전히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애초부터 탑은 수직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쌓아 올려지고 있고 아래층을 완성하기도 전에 위층을 쌓아 올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결국 공사는 실패할 것이고 바벨탑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화가는 처음부터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뤼헐은 왜 바벨탑을 그렸을까? 그 답은 오늘날의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인 플랑드르의 정치와 사회적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플랑드르는 대외적으로는 과도한 세금 등 강압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즉 80년 전쟁(1568~1648)이 그의 인생 말년에 벌어진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민중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 갔고, 이는 브뤼헐에게 극도의 좌절감을 안겨줬다. 그에게 당시 사회는 멸망 직전의 바빌로니아나 로마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브뤼헐은 경고하고 싶었다. 

탑이 기우뚱한 것은 사회가 균형감각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며, 공사의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은 계층 간의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불합리한 사회의 혼란을 상징한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신의 심판이 다가오리라는 경고처럼 먹구름이 잔뜩 몰려와 바벨탑을 가리고 있다. ​​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0)
보이만스 판뵈닝언 디포 바벨탑 왼쪽 아래 부분

끝없이 높은 건물을 쌓아 올리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현대인의 한없는 욕망과 탐욕이 바빌로니아인이나 로마인들의 욕망이 다름없다고 그가 성찰하여 그린 것이다. 

브뤼헐이 수백 년 전 바벨탑을 통해 던진 경고의 메시지는 전쟁과 환경훼손이 지속되는 오늘날의 인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0)
빈 미술사 박물관 ‘바벨탑’ 부분

왼쪽 하단에는 신 바빌로니아의 대왕인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공사현장을 현지 지도하고 있다.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는 아카드어이고, 영어로는 네부카르네자르(Nebuchadnezzar) 2세로 표기한다. 

성서에는 ‘느브갓네살’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는 망토를 걸치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 그의 앞에는 석공들이 예를 표하고 있고, 일꾼들은 석재를 다듬고 있다.​​​

기원전 1000년 전후는 한때 우세했던 정치 세력들이 멸망해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동부 그리고 이집트에 이렇다 할 세력이 없는 기간이었다. 

그 권력의 공백기 뒤에 신 앗시리아 제국(기원전 약 911~612년)과 신 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약 626~539년)이 나타났다. 신 앗시리아 제국의 미술은 수도의 궁전을 장식한 대형 석판 부조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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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막 여신의 신전을 재건하는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의 명문이 새긴 원통, 기원전 약 604~562년, 신 바빌로니아 시대, 바빌로니아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신 바빌로니아 시대의 왕 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수도 바빌론(Babylon)에 어머니 여신 닌막을 위한 신전을 재건하며 작성한 원통형 문서이다. 

명문(銘文)은 여신이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복을 주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러한 형태의 문서를 건물 기초에 묻는 전통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신 바빌로니아 시대는 물론 후대 아케메네스 왕조와 헬레니즘 시대의 통치자들도 이 전통을 따랐다.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출토된 백제 무령왕릉도 지석이 발견되어 서기 529년이란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신 바빌로니아 제국은 우수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왕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신들의 문’이라는 도시 바빌론을 재건했다. 양질의 벽돌로 지은 건축물이 주종이었던 이 시기에, 그 건축 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한 면에 색을 넣은 벽돌들을 조합해서 만든 다색의 부조 조각은 거대한 크기로 바빌론의 벽을 장식했다. 

그 중 사자와 무슈후슈 용으로 장식한 ‘이쉬타르 문’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기 바빌론은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가 왕비를 위해 세운 공중정원 등으로 인해 고대 세계에서 불가사의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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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벽돌 패널, 기원전 약 604~562, 신 바빌로니아 시대, 바빌로니아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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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벽돌 패널

이슈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는 구운 벽돌로 쌓은 벽의 일부이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배경에 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표면에는 유약을 발라 단단하고 광택이 나게 구웠다. 동쪽 벽에 있는 사자들은 모두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서쪽 벽은 모두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이 같은 실물 크기의 갈기와 털을 다르게 한 사자 부조상 120 개가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에서 ‘신년 축제의 집’까지 이어지는 ‘행렬의 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쉬타르 문의 정면도 아다드 신과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575구의 황소와 용의 부조상으로 꾸며져 있다. 

발굴된 일부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다. 사신들이 이 길을 통과해 통치자를 배알하러 갈 때 제국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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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만스 판뵈닝언 디포 바벨탑 왼쪽 하단 부분 

왼쪽 아래에는 숲이 있고 한 사람은 벌목을 하고, 또 한 남자는 나무를 다듬고, 한 사내는 그늘에서 쉬고 있다. 

이들은 작품을 해석하는 두 번째 초점이다. ​​브뤼헐은 탑을 건설하고 있는 수백 명의 일꾼을 작은 크기로 그렸다. 그는 작은 화폭에 많은 대상과 인물을 그렸는데, 이로서 그는 ‘군집회화(群集繪畵)’라는 새로운 장르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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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만스 판뵈닝언 디포 바벨탑 부분

그림을 자세히 보면, 붉은 벽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내부는 그늘에서 말린 벽돌을, 외부에는 구워 낸 벽돌을 사용했으며 약 8500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1419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조적식 돔을 쌓았을 때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적식 돔이다. 

그러나 바벨탑은 페렌체의 돔보다 약 21배의 크기이다. 동방원정을 떠난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로니아에서 무너진 바벨탑을 복구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기원전 3000년 전에 이미 아치를 사용하고 있었다. 개방적인 로마인들은 이 아치 기법을 가져와 로마 건축의 특징으로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인 부벽(扶壁, Buttress)이 벽을 지탱한다. ​​ 

건축 자재를 올리는 도르래를 이용한 기중기와 사다리에 올라가는 인부들이 자세히 그려졌다.​​ ​​

브뤼헐은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였다. 15세기의 반 에이크 형제와 더불어 17세기의 네덜란드의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의 독립전쟁과 종교 전쟁의 와중에서 당면한 사회적 고민을 화가로서 그림으로 담아낸 위대한 선각자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보고 들었던 사실과 성서의 이야기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보스를 비롯한 플랑드르 화가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정립하였다. 그리하여 플랑드르의 미술은 브뤼헐 덕분에 당당히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벨탑으로 표현한 인간의 오만 방자함에 대해 한결 같은 경고성 메시지를 지금도 주고 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