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검증구역’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찾아서 [주말뭐봄]

기사승인 2024-02-17 06: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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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은 많고 시간은 짧은 주말입니다. OTT를 볼지 영화관으로 향할지 고민인 당신, 어서 오세요. 무얼 볼지 고민할 시간을 쿠키뉴스가 아껴드릴 테니까요. 격주 주말 찾아오는 [주말뭐봄] 코너에서 당신의 주말을 함께 할 콘텐츠를 소개해드립니다. <편집자주>


‘사상검증구역’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찾아서 [주말뭐봄]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스틸. 웨이브

페미니즘 정당에서 활동했던 여성과 남성잡지 모델인 여성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을 놓고 누군가 쑥덕댄다. “저 사람들은 한팀이 될 수 없는 거 아니야? 페미와 반(反)페미로?” 둘을 갈라놓자고 공조하는 두 남성도 한 명은 페미니스트, 다른 한 명은 ‘이퀄리스트’(안티 페미니스트)다. 지난달 공개된 웨이브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사상검증구역)는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닌 12명을 모아놓은 생존 예능이다. 사상은 정치·젠더·계급·개방성 4개 기준에서 각 1~3점으로 매겨진다. 다른 참가자의 성향과 점수를 모두 맞추면 상대는 탈락하고 그의 돈은 내 것이 된다. 이들 중 한 명은 공동체에 혼란을 불어넣는 불순분자 역할을 맡는다. 참가자들은 리더를 뽑고 돈을 벌고 공금을 내며 작은 사회를 꾸린다.

‘사상검증구역’ 어땠어?

말 그대로 재미있다.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속임수와 내 편을 늘리려는 물밑 공작이 흥미롭고, 망한 토론이 웃기다. 정당 소속 정치인이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은 믿지 말라’고 말하거나 ‘국가 발전에는 유능한 독재자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주장할 땐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자신의 사상대로 행동하는 참가자도 재밌지만, 사상을 배반하는 행동은 더 재밌다. 자신을 개방적인 사람으로 정체화한 참가자가 선입견을 강화하는 소수자 재현 토론에서 몸을 사릴 때나, 불공정한 환경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던 참가자가 가난을 호소하는 다른 참가자에게 상금을 양도할 때 시청자는 눈이 커진다. 그들처럼 우리 역시 모순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임을 새삼 발견하게 돼서다. “우리가 이렇게 4개의 기준으로 점수화됐지만 우리는 이 기준으로 범주화될 수 없는 독특한 사람들”이란 하마(별명·하미나 작가)의 말이 모니터를 바깥으로 확장한다.

‘사상검증구역’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찾아서 [주말뭐봄]
‘사상검증구역’ 스틸. 웨이브

‘사상검증구역’의 참가자들은 탈락자를 최소화하는 안전한 사회를 지향한다. 단 한 개의 왕좌를 위해 다수에 대한 다수의 투쟁을 벌이는 여느 서바이벌과는 다르다. 그런데 안전한 사회란 무엇일까. 평화 유지 연합을 자처하는 네 참가자는 불순분자로 의심되는 이를 고립시켜 탈락하게 할 계획을 세운다. 다수를 보호할 목적이라고는 하나 불순분자를 잘못 짚을 경우를 대비하지는 못한다. 불순분자로 몰려 억울하게 탈락한 참가자를 복원할 수 없는 이 전쟁은 과연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참가자들이 누군가를 탈락시키려 하는 사람을 불순분자로 간주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탈락자를 많이 발생시키는 것이 불순분자의 목적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불순분자로 몰리기에 십상이다. 불순분자로 의심받아 탈락하는 상황을 걱정해 반대 의견을 속으로 삼키는 사회는 과연 안전한 곳일까.

의심 섞인 눈초리로 프로그램을 볼 때쯤, 참가자들이 또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예상이 빗겨나고 혼돈이 회오리친다. 평화 유지 연합은 차츰 와해된다. 두 정치인이 권력을 두고 부딪히며 토론은 한층 격렬해진다. 여기에 출신지가 다른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하면서 ‘사상검증구역’엔 점점 더 다양한 욕구와 불안이 얽히기 시작한다. 토론을 보고 있자니 ‘얘 말을 들으니 얘가 옳구나. 쟤 말도 들어보니 쟤도 옳구나’ 하는 황희 정승의 심정이 된다. 이렇게 작은 공동체도 복잡한데 5000만 인구가 모인 국가는 얼마나 더 혼란할까.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잠시 생각해본다. 내가 살고 싶은 사회는 어떤 곳일까. 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프로그램 안에서 던져진 질문들이 현실로 건너와서다. 그래도 딱 하나는 분명하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살고 싶든, 그곳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 다만 그곳을 ‘만들’ 수는 있다는 것. 8화에서 발생한 탈락자가 아쉽고 불순분자가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쩐지 낙관적인 기분이 든다.

‘사상검증구역’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찾아서 [주말뭐봄]
‘사상검증구역’에 각각 마이클, 하마라는 별명으로 참여한 래퍼 윤비(왼쪽)와 작가 하미나. 웨이브

주목, 이 인물! 마이클(별명·래퍼 윤비) & 하마

개인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마이클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능력자다. 그는 솔직하다.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도움을 호소하는 데 부끄럼이 없다. 경계심이 강한데 별 것 아닌 이유로 마음을 열기도 한다. 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데 열심이라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꾸미지 않은,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그의 말과 행동은 때로 불쾌하지만 가끔 통쾌하고 자주 재밌다. 하마는 마이클의 정 반대편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특화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지 않기란 어렵다. 하마는 ‘사상검증구역’이라는 독특한 공동체가 가진 가능성을 즐겁게 탐색한다. 사상과 관계없이 타인과 관계 맺되 다수에 동화되기 위해 자신을 감추거나 속이지 않는다. 하마를 ‘사상검증구역’에서 더 오래 보고 싶었다. 언젠가 그가 ‘사상검증구역’에서 발견한 것들을 들을 수 있길 기대한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