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의사 불패’”…재점화된 형평성 논란

“또 ‘의사 불패’”…재점화된 형평성 논란

기사승인 2024-07-14 06:05:02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옮기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
지난 2월 SNS에 이같이 밝힌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의 주장은 5개월 뒤 현실이 됐다.

최근 정부는 ‘의사 불패’ 꼬리표를 떼지 못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미복귀 전공의들에게 면허 정지 등 행정처분을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의대생들이 일부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아도 유급되지 않도록 특례 조치도 마련했다. 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고, 정부는 부랴부랴 대처하다가 결국 물러서는 일이 이번에도 반복된 것이다.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의료계는 국민을 이길 수 없다. 지난 정부처럼 지나가지 않겠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참모진으로부터 의료계 집단행동 관련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이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사들의 의료현장 이탈에 원칙을 세워 대응하며 의료개혁을 관철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불법 집단행동은 용인될 수 없다며 각종 행정명령을 내리고 완강하게 조치를 취하던 정부의 의지는 5개월째 이어지는 전공의 공백과 의대생 수업 거부 앞에서 꺾여버렸다. 정부는 유화책을 섞어가며 설득에 나섰지만, 무응답으로 일관한 전공의와 의대생에게 백기를 들었다.

보건복지부는 복귀하는 전공의뿐 아니라 소속 수련병원에 돌아오지 않고 사직하는 전공의에 대해서도 행정처분을 철회하기로 했다. 또 미복귀 전공의들이 병원에 돌아올 수 있도록 모집 과목 제한 완화 등 ‘수련 특례’를 적용하고, 오는 9월 하반기 모집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부는 수업을 거부하고 있는 의대생들이 학교로 복귀하면 유급을 당하지 않고 보충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의과대학 학사 탄력 운영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통상 의대생들은 한 과목이라도 낙제점(F)을 받으면 유급된다. 이 땐 다음 해에 같은 과정을 다시 들어야 하는데, 추가로 비용을 내지 않고도 대학이 마련한 보충 학기를 이수할 수 있게 했다. 또 예과 1학년은 F를 맞더라도 유급 요건을 한시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일정 기준 이상 평점과 학점 이수량을 채우면 진급할 수 있도록 했다.

6월18일 대한의사협회가 서울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의료농단 저지 전국의사 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전공의와 의대생은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백지화 등을 요구하며 등을 돌렸다.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에 따르면 내년도 의사 국가시험 응시 예정자 중 95.5%가 응시를 거부했다. 전국 40개 의대 본과 4학년 3015명 중 2773명이 국가시험에 필요한 개인정보 제공 동의서를 학교 측에 제출하지 않은 것이다.

전공의 복귀도 요원하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211개 수련병원에 출근한 전공의는 전체 1만3756명 중 1094명(복귀율 8%)으로 집계됐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0일 자신의 SNS에 “우리의 요구는 단호하고 분명하다”면서 “학생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의사 ‘불패 신화’는 2000년 의약분업 사태, 2014년 원격의료와 의료법인 영리화 사태, 2020년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도입 사태, 2024년 의대 증원 사태까지 매 의정 갈등 상황마다 재현되고 있다. 정부는 ‘불법 집단행동에 면죄부를 줬다’, ‘유례를 찾기 힘든 특혜를 제공했다’, ‘공정성을 포기했다’ 등의 비판에 직면했다.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박수혁(36·가명)씨는 “특혜를 누리면서 특혜에 대한 의무는 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과연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 민주주의 가치에 부합하는 행태인가”라며 “이런 행태를 수용한 것과 다름없는 정부의 행보가 실망스럽다”고 했다. 

보험업계에서 일하는 김은지(30·가명)씨는 “의사들이 선민사상에 빠지게 된 것은 이런 특혜 때문”이라며 “의대생과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정말 의료 환경과 환자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묻고 싶다. 정부는 복귀하지 않는 의사들한테 매달리는 일을 관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의 한 의과대학 전경. 쿠키뉴스 자료사진

특혜 조치는 형평성 논란뿐만 아니라 교육수련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란 우려를 불러왔다. 전국 40개 의대의 수련병원 74곳 교수 대표들은 지난 12일 입장문을 내고 교육부의 ‘의대 탄력 운영 가이드라인’에 대해 “의학 교육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어불성설 편법 대잔치”라고 평가했다. 교수들은 “교육부가 환자와 국민을 위한 선진 의학 교육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전했다.

서울대병원 등 ‘빅5 병원’은 정부의 요구에 따라 6월4일자로 전공의 사직서를 처리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이날은 정부가 수련병원에 내렸던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을 철회한 날이다. 전공의들이 사직 처리 기한 내에 얼마나 복귀할지, 또 사직 처리 후 다른 병원에서 수련을 이어갈지 등이 관건이다. 복지부는 오는 15일까지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사직 처리를 완료하고 결원을 확정해달라고 전국 211개 수련병원에 요청한 상태다.

현재로선 정부의 특혜 지원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전공의, 의대생은 극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대로 복귀하지 않으면 내년 인턴, 전문의, 공중보건의사, 군의관 등의 수급 차질은 불가피하다. 고려대 안암병원장을 지낸 박종훈 고려대 의대 정형외과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 빼고 다 양보하고 내줄 수 있는 건 모두 내줬지만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는다”며 “전공의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현 상황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복귀의 길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짚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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