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의 고등학생 조성진, '가전 신화'가 되다 [이 청년은]

기술 독립의 꿈을 이룬 열정과 노력
최대 자산은 '현장 경험'

기사승인 2022-05-04 15: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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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고등학생 조성진, '가전 신화'가 되다 [이 청년은]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   LG전자

대내외 경영환경 악화로 우리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다. 실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비교해 감소했지만 여전히 청년들에게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다. 기업들도 경영환경 악화에 실적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나라 경제를 이끈 기업인들의 젊은 날을 어땠을까. 이들은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조명해 본다. [편집자]


"한 회사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을 다닌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퇴조차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젊음을 포함해 모든 것을 LG전자와 함께 했기에 후회나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고졸 신화', '가전의 신화'로 대변되는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의 삶에는 열정과 노력,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정신이 곳곳에 묻어나 있다. 그래서 그의 말 속에는 '혁신'·'도약'·'노력'·'도전'의 진취적인 기상이 늘 녹아 들어 있다.

조성진은 도자기 장인이던 아버지의 뜻으로 고교를 진학 하지 못하고 가업인 '요업(窯業)'을 물려받을 뻔했다. 하지만 '청년 조성진'은 요업과 공업계 고등학교가 관련 있음을 겨우 설득해 용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성진이 이때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하고 요업을 물려받았다면? 가전의 명가 LG 타이틀은 다른 기업의 차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1976년 19살 청년 조성진은 용산공고 산학 우수 장학생으로 금성사(LG전자 전신)에 입사한다. 그가 입사할 당시는 선풍기가 가장 인기 있고 유망한 가전제품이어서 동료들은 선풍기 개발실을 선호했다. 하지만 조성진은 세탁기 설계실을 지원한다. 당시만 해도 세탁기는 기술력이 없어 모두가 기피하던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세탁기 보급률은 0.1%에 불과했다.

"세탁기 개발 초창기 10여 년간 일본의 기술을 들여다 제품을 출시하면서 일본에도 없고 세계에도 없는 기술을 만들어보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집념의 고등학생 조성진, '가전 신화'가 되다 [이 청년은]
세계최초 DD모터 통돌이 세탁기.  LG전자
조성진은 세탁기가 반드시 대중화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입사 후 하루 18시간씩 공부하며 남들이 대학 4년 동안 배울 기술을 단 1년 만에 익혔다. 이런 그의 노력에도 LG의 세탁기 기술력은 형편없었다. 일본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 수 없었다. 

조성진은 '일본을 넘어 세상에 없던 세탁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그는 일본을 뛰어넘는 세탁기 개발을 위해 10년 동안 150번 넘게 일본 출장을 갔다. 일본 출장 마일리지만 30만 마일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성진은 세탁통과 모터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다이렉트 드라이브(DD) 모터를 적용한 세탁기를 만들고 싶었다. 세탁통과 모터가 벨트로 연결된 기존 세탁기보다, DD모터를 적용한 세탁기 성능은 에너지효율과 소음 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발 의욕만큼 제품 개발은 쉽지 않았다. 정밀 부품을 국산화하려다 보니 투자비가 많이 들었다.

조성진은 회사에 침대와 주방 시설까지 갖춰 놓고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조성진은 유년 시절 부친이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배운 인내와 집념, 제품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유명하다. 일에 대한 욕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에 대한 집념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명한 사건이 있다. 조성진은 지난 2014년 독일 가전박람회(IFA)에서 삼성전자 크리스털블루 세탁기 2대와 건조기 1대의 문을 아래로 여러 차례 눌러 도어 연결부(힌지)를 고의로 부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기까지 했다. 대법원까지 갔을 정도로 공방이 치열했는데 결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8년 조성진은 마침내 세계 최초로 세탁 통에 직접 연결된 모터로 작동되는 DD모터 개발에 성공한다. 일본에 대한 기술 종속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LG전자는 DD모터가 세계 1등 신화 LG 세탁기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한다.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새벽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화돼 집에서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품이 출시됐을 때와 가족과 함께 TV를 보다가 상품광고가 나올 때 그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한다.

"가전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세상에 없던 제품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2019년 11월 은퇴하면서

조성진은 DD모터에 이어 △2005년 세계 최초 듀얼분사 스팀 드럼세탁기 △2009년 6가지 손빨래 동작을 구현한 '6모션' 세탁기 △2015년 세계 최초로 상단 드럼세탁기와 하단 미니워시를 결합한 '트윈워시' 등 세상을 놀라게 한 혁신 제품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세탁기 세계 1등 신화를 써 내려갔다.

조 부회장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개발해 낸 DD모터, 트윈워시 등을 귀한 자식처럼 여긴다. 실제로 조 부회장은 1998년, 2013년에 각각 LG 세탁기의 TV광고 모델로 직접 출연해 제품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집념의 고등학생 조성진, '가전 신화'가 되다 [이 청년은]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이 직접 출연한 광고의 한 장면.   LG전자

"우리나라가 기술 속국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연구개발에 몰두했던 때가 이젠 마음속 추억으로 아련히 남습니다."

조성진은 현장 경험을 더 일찍, 더 많이 한 것이 본인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기업의 현장이 이론과 실체를 잘 결합하고 열정적인 성향의 독한 인재들이 성과를 내는 곳인 만큼, 치열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졸로 입사해 최고경영자(CEO) 자리 오른 조성진. 세탁기에 대한 열정으로 LG의 가전 신화를 써 내려간 그의 여정은 43년간 회사에 몸담으며 세계 최고 가전 목표를 이룬 후 지난 2019년 11월 28일로 끝이 났다. 

윤은식 기자 eunsik80@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